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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강변호텔>은 처음부터 강렬하고 잔혹하다. 강한 햇빛을 받으며 호텔방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시인 영환(기주봉)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죽음, 후회, 체념으로 가득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그는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 두 아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던 중이다. 한편 상희(김민희)는 자신을 찾아 호텔로 온 연주(송선미)와 함께 수다를 떨고 낮잠을 자고 산택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영환은 아들들을 기다리며 산책을 하다 상희, 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두 아들을 만나 그들과도 대화를 이어간다.

 익숙한 홍상수의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강변호텔>은 또 다른 홍상수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우선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은 촬영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의 화면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이 보인다. 95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죽음의 징후는 오프닝 쇼트의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변호텔> 속 죽음은 <풀잎들>이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자유의 언덕>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 혹은 유령과는 조금 다르다. <강변호텔>은 홍상수의 유령들이 떠돌던 폐쇄된 미로들과는 다른, 죽음이라는 소실점을 정확하게 응시하며 진행되는 직진의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응시하며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을 찾아다니고, 경수와 병수는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기는커녕 두려워하며 그것에서 멀어지려는 말만을 던진다. 반면 상희와 연주는 이미 죽음에서 해방된 마냥 남성들을 향해 조소를 보내고, 관조하고, 때로는 동조하기도 한다. 상희와 연주는 다른 세 캐릭터들과 한 공간에 존재하긴 하지만, 경수와 병수는 (심지어 연주가 경수의 장갑을 훔쳤음에도) 이 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영환은 죽는다. 개인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GV를 통해 듣기로는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 이후로 처음) 죽음이 직접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다. 영환은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응시하던 죽음으로 그대로 직진한다. 영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징후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영환과 두 여성 캐릭터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내린 눈은 초현실적인, 일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장면에서 분명 강은 얼어 있고, 그 위에 흰 눈이 쌓여 있다. 그 뒤 호텔로 돌아온 영환은 두 아들은 만난다. <강변호텔>은 만 하루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강은 흐르고 있다. 영환이 홀로 산책하는 플래시백(으로 추정되는) 장면에서는 다시 강이 얼어 있다. 흐르는 것과 정지된 것, 고정된 카메라 대신 어깨에 메고 촬영해 흔들리는 카메라. 단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움직임, 생에 관심을 두며 죽음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려는 이들은 더더욱 지금에 고정되어버린다. 반면 죽음을 응시하거나 그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인물에겐 정지된 삶 혹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세한 진동이 허락된다.

 영환만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얼어붙은 강은 정지된 듯 보이지만 계속 흐르고 있고, 녹은 뒤 다시 흘러갈 것이다. 영환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마치 상희가 애인에게 버림받은 뒤 연주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환은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들을, 경수는 ‘병신’이라면서 놀리지만 영환 자신이 부여한 병수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실패 또한 사랑의 한 부분임을 모두 끌어안으려 한다. 영환이 마지막으로 낭독한 시의 주인공 피터(신석호)의 모습은 흐릿하게 포커스아웃 된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숨을 거두어가는 영환의 모습 또한 포커스아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사 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사람이 되고, 흐릿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응시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과의 연대만이 함께할 뿐이다.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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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야기적으로 매끄러워지고 형식적으로 안정화되고 있으며, 감정적으로 진해지고 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는 반성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존경과 존중의 고백을,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자기파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의 21번째 장편영화인 <그 후>는 사랑이라는 테마를 정면으로 대하며 믿음이라는 태도로 이를 대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플래시백, 캐릭터로 등장하는 유부남 주인공의 아내 등의 요소는 이러한 태도와 변화를 반영한다.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의 꼬여버린 하루는 투명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인물들에 의해 홍상수의 태도를 대변한다.



 첫 쇼트는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기도 전에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조윤희)가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을 준비하는 그는, 아내와 대화하던 중 바람피우던 상대가 있다는 것을 들킨다. 회사에 출근한 봉완은 그 날 첫 출근한 아름(김민희)을 맞이한다. 중국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아내가 갑자기 회사로 찾아와 아름에게 “네가 그 년이지?”라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봉완이 도착하고 괴상한 3자 대면 끝에 아내는 집으로 돌아간다. 봉완은 저녁자리에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아름을 달랜다. 그러던 중 봉완의 불륜 상대인 창숙(김새벽)이 찾아오고, 봉완은 다시 창숙과 함께하려 한다.



 이전의 홍상수에서 볼 수 없었던 플래시백의 활용은 굉장히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쇼트 순서와 실제 촬영의 순서가 동일한 홍상수의 작업방식을 생각해보면, 그의 영화 속 플래시백은 영화의 시제를 어그러트린다. 이런 어그러짐은 영화의 전체의 이야기가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 초반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화장실에서 나온 봉완이(첫 번째 쇼트)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다 불륜 사실을 들키고(두 번째 쇼트) 출근을 위해 아파트를 나선 뒤(세 번째 쇼트) 영화는 갑자기 다른 옷을 입은 술 취한 봉완과 그를 부축해주는 창숙을 보여주고(네 번째 쇼트) 지하주차장에서 애정을 나누는 둘을 보여준다(다섯 번째 쇼트). 그리고 다시 돌아와 출근을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봉완(여섯 번째 쇼트)가 등장한다. 출근하는 봉완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플래시백으로 보는 것이 보통의 영화문법이겠지만, <그 후>를 보는 관객은 저 플래시백이 과거인지 출근 이후 봉완의 모습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없다. 극 중 시간이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할 수 없는 흑백의 영상은 플래시백과 함께 영화의 시제를 어질러 놓는다. 지하철에서의 플래시백이 숏-리버스 숏을 통해 출근길의 봉완으로 돌아오는 쇼트, 아름이 출근한 모습을 보여준 이후 이후 출판사에서 일하는 창숙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역시 계속해서 시제를 어그러트린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하루 동안의 사건이다. 봉완은 새벽에 출근해 첫 출근한 아름을 맞이하고,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내가 회사에 찾아오고, 닭볶음탕을 저녁으로 먹고, 창숙과 재회한다. 그러나 영화의 쇼트 순서대로 진행되는 촬영은 배우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연기하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몇몇 행동, 가령 봉완의 손을 잡는 아름 등은 그 속의 시제를 다시 한번 어그러트린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투명한 인물들이고, 홍상수는 그 시간을 지나 남은 잔존물을 실존이라 부르려 한다. “만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세요”라고 봉완에게 물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를 올리는 아름의 모습은 홍상수가 바라는 믿음 그 자체를 드러낸다. 과거-현재 그리고 그 후를 관통하는 감정의 잔존물이 중국집에서 아름과 봉완이 논하던 실존이고, 에필로그에서 봉완이 아름에게 준 소세키의 소설 『그 후』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치환된 믿음과 경험의 잔존물이다.



 봉완과 아름이 만나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그 후>는동명의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다. 책을 읽어보지 않아 여기에 덧붙일 코멘트는 없지만, 영화는 ‘그 후’라는 제목이 누구의, 어느 사건의, 어느 시점의 그 후인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함께 한 세 편의 겨울 영화 그 후일까, 봉완과 창숙의 작당모의 그 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제목의 그 후가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는 홍상수만이 알고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그 후>의 그 후는 영화를 만들고 관람한 모두에게 다른 시점으로 남는다. 홍상수는 그 시간을 뚫고 남은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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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북촌방향>과 <다른나라에서>를 시작으로 영화 속 시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온 홍상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이야기 자체의 변화까지 보여줬다. 그러한 변화는 홍상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홍상수 본인을 포함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영화 속 찌질한 남성들의 구애를 받아내는 위치였던 영화 속 여성에게 솔직함을 드러내고(<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들을 존대하기 시작했다(<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현실 속 여러 논란과 겹치는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다른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있지만) 홍상수 영화의 첫 여성 원 톱 주연 영화이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느껴진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밤의 해변에서의 혼자>의 주인공 영희(김민희)는 영화 내외적으로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아닌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조금씩 보여오던 변화가 비로소 완성되고, 새로운 단계의 홍상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손글씨 오프닝 크레딧을 버리면서 시작한다. 타자기로 적당히 친 것 같은 폰트의 오프닝 크레딧은 그의 전작들을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영화의 문을 연다. 2부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영희와 지영(서영화)이 함부르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영희는 함부르크로 찾아올지 아닌지도 모를 불륜관계에 있던 영화감독이자 유부남 상원(문성근)을 기다린다. 영희는 공원에 있는 다리를 건너기 전,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그의 소원은 상원이 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앞길을 바라는 소원이다. 2부에서는 영희가 준희(송선미)를 만나기 위해 강릉을 찾고, 선배인 천우(권해효)와 명수(정재영) 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천우, 명수, 준희, 명수의 애인인 도희(박예주)와 함께 하는 술자리와, 우연히 만나게 된 조감독 승희(안재홍)를 통해 만난 상원과 영화 스태프들과의 술자리, 총 두 번의 술자리가 등장한다. 사랑, 관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영희의 대사는, 때로는 현실의 논란이 생각나 실소가 터지기도 하지만, 자리의 다른 인물들을 찍어 누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자기파괴적인 영화이다. 2부의 세 남자 상원, 천우, 명수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배우들을 기용하고,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다시 소환해낸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술자리 장면에서 괴력의 연기를 선보이는 김민희의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대사로, 표정으로 찍어 누르고 압도하며 영화를 장악해나간다. 다시 말하자면,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영화 속에서 부수어버린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김민희의 연기를 빌어 파괴한다. 손글씨를 버린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원경에서 인물을 잡은 쇼트나 풍경을 잡은 쇼트 등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을 탐구해온 작가는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영화 속에 반영시켰고, 이번 영화를 통해 (그리고 현실의 사건을 빌어) 자신을 파괴한 뒤, 그 내면을 영화로 담아낸다. 김민희의 몸을 빌어 진행되는 홍상수의 자기파괴는 김민희에겐 자기 반영으로 느껴진다.



 1부와 2부엔 각각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등장한다. 1부의 남자는 공원에서 난데없이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묻는다. 모른다는 둘에게 “핸드폰 그런 것도 없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남자는 해변에서 김민희를 둘러업고 저 멀리 달려간다. 2부의 남자는 영희의 숙소 베란다 창문을 닦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방에 있는 영희, 준희, 천우 모두 남자의 존재를 그가 마치 유령인 것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남자는 창문을 닦지만, 깨끗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더럽기만 하다. 어느샌가 그는 닦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이 남자는 홍상수가 영화 속에 등장한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준다. 누군가의 시간 안에 들어오고, 그를 데려가며, 투명해지려 계속 창을 닦지만 깨끗해지지 못하는 사람. 자기파괴적인 그의 영화에 등장한 (그의 영화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캐릭터는 그의 분신으로써 영화에 끼어든다. 이야기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유령으로써 영화 안에 등장하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까지 조금씩 변화를 보이던 그의 영화가 만든 하나의 결과물이다. 현실과 영화가 뒤섞인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의 신작은,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영화 세계의 새 단계를 연다.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초기작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만든 영화가 아닐까? 이자벨 위페르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고, 그의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 정진영, 어김없이 다시 출연하는 김민희가 뭉친 홍상수의 차기작 <클레어의 카메라>가 기대된다.6/220967125879

*스포일러 주의 


 홍상수의 21번째 장편영화인 <그 후> 보다 늦게 20번째 장편영화가 국내에 도착했다. 오늘(4월 18)일 언론시사회 및 영화비평독립잡지 필로(FILO)의 창간 기념 상영회를 통해 국내에 첫 상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2011년 <다른나라에서> 이후 이자벨 위페르가 다시 한번 홍상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재회가 가능했던 것은 영화가 2016년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칸을 배경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상수와 22번째 작품인 <풀잎들>까지 내리 5작품을 함께하는 중인 김민희는 <아가씨>로, 이자벨 위페르는 폴 버호벤의 <엘르>로 각각 칸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직접 칸 국제영화제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영화 내내 영화제가 언급되고 칸을 찾은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이 등장하기에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영화가 칸 영화제 기간의 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익숙한 홍상수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영화제 기간 동안의 업무를 위해 칸을 찾은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는 갑작스레 상사인 양혜(장미희)에게 해고당한다. 양혜는 만희가 부정직하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얼떨결에 일도 없이 칸에 남게 된 만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만희가 만나게 된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풍경과 사람들을 찍고 다닌다. 한편 양혜는 영화제에 초청된 완수(정진영)와 함께 영화제 일정을 준비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양혜와 완수는 애정관계에 있으며, 완수가 술에 취해 만희와 보낸 하룻밤에 의해 해고된 것임이 밝혀진다. 술과 술자리, 애정문제, 외도 등 익숙한 소재들이 69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이어진다.



 칸에서 <클레어의 카메라>가 촬영되는 동안 국내에서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외도 루머가 등장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김민희와의 협업 이후 그의 외모를 한 여성 캐릭터가 홍상수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찌질한 남성 캐릭터들을 찍어 누르는 분열적인 작품이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선 애정에서 비롯된 존중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후>는 의외로 장르적인 문법을 (약간) 차용하여 삶과 사랑을 예찬하는 영화였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과한 홍상수의 가장 반박적인 영화인 것으로 느껴진다. 만희와 완수, 기시감이 느껴지는 두 캐릭터의 이름과 영화의 첫 쇼트에서 목격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포스터는 <클레어의 카메라>가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강하게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칸을 찾은 세 한국인(만희, 양혜, 완수)의 곁을 맴돌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아낸다.



 만희는 클레어에게 “당신은 왜 사진을 찍나요?”라고 묻는다. 클레어는 “왜냐하면 세상 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만사를 다시 매우 천천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한다. 관객은 클레어를 따라 세 명의 인물을 바라본다. 클레어는 또한 “사진을 찍힌 사람은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돼요.”라고 말한다. 촬영과 동시에 사진을 인화해내는 클레어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재빠르게 카메라에 담긴 이와 카메라 밖의 존재를 분리한다. 사진에 담긴 이와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찍힌 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클레어는 이에 의문을 가진 완수와 양혜에게 천천히 자신의 눈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느낌이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완수는 이를 통해 카메라에 찍히기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을 분리해낸다. <클레어의 카메라>의 서사 속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관객은 클레어의 눈을 응시하는 완수처럼 스크린을 응시하며 뒤틀린 시간을 맞춰보려 한다. 만희가 해고당한 당일,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시점, 그리고 그다음 날.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극 중 시간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옥상 위 만희의 시간은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 위선으로 가득한 완수와 양혜가 짜 맞추려는 만희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돌출되어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즉각적으로 분리되는 개인이라는 감각과 연결된다. 영화는 이러한 개인을 천천히 응시하기를 바란다.



 홍상수는 반복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한다. 홍상수라는 개인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클레어의 카메라>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스캔들 이후 음모론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물어뜯기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 그가 한국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촬영한 세번째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홍상수라는 개인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촬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의 최근 필모그래피 (특히 김민희를 만난 이후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애매한 작품이라 느껴지지만, 동시에 여전한 그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인 <클레어의 카메라>는 에릭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6부작의 <클레어의 무릎>을 연상시킨다. 무척이나 성애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클레어의 무릎>이 지닌 육감적인 감상과 <클레어의 카메라> 속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이성은 사뭇 대조적이다. 홍상수가 카메라라는 장치를 꺼내 든 것은 영화가 그려내는 개인과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가 담아낸 위선을 응시하길 바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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