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Feature '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최근 듣고 있는 강의-심혜경의 불온한 스크린 관찰기-를 듣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제의 수업이다. 어제 강의의 제목은 “너무나도 촌스러운 그녀의 이름에 대해: 용순이와 미자 그리고 숙희와 미옥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용순>, <옥자>, <악녀> <미옥> 등 2017년에 개봉한, 그리고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들을 다루고 있다. 강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네 편의 영화는 60~80년대에 주로 사용되던 여성화된 촌스러운 이름들을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우는데, 여성중심적인 영화를 표방한 이들 영화들은 왜 2017년에 다시 이러한 이름들을 소환하는 것일까? 각 영화들의 시대가 <아가씨>처럼 과거의 시점인 것도 아니다. 네 편의 영화는 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명백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강의는 2005년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강력한 모성의 힘으로 복수에 성공한 뒤, 이러한 촌스러운 이름의 여성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고, 여러 액션을 벌이는 등 자신들의 육체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이용하며, 동시에 성(姓)이 없고 애인/어머니/딸 등의 관계로써 호명된다.



 이름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지표이기도 하고, 성과 관련된 부분은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써의 개인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결국 ‘이름을 가진다’라는 행위는 개인이 자아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받은 것이든 스스로 지은 것이든)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존재성 자체의 문제와 직결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이 어떻게 작명되었는지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까지 여성의 이름에는 성이 포함되지 않았다(혹은 포함되었더라도 제대로 불리지 않았다). 여성은 가문의 대를 잇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재생산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며느리로서 다른 가문에 보내지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될 교환물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가문을 잇는 것과는 상관없는, 그렇기에 양반이 아닌 상놈들처럼 성이 필요 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역사 속에 기록된 여러 여성들의 이름이 혜경궁 홍씨라던가 폐비 윤씨처럼 남편/아버지의 성으로만 기록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설명된다. 1909년 민적법이 실시되면서 신분과 성별의 구분 없이 성과 이름이 생기게 되고,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과 호적법을 거치며 70년대까지 주로 등장하던 여성화된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령 자(子), 숙(淑), 옥(玉), 순(順), 희(姬) 등 아들을 염원하거나 여성이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한자들이 들어간 이름이 곧 여성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80년대 들어 이름이 현대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는 줄어들게 된다.

 

 공교롭게도 강의에서 다루는 네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앞서 언급한 다섯 한자가 골고루 섞여 들어간 이름들이다. 동시에 그들의 성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이 이름들은 주인공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제목이라는 지위를 꿰차고 있다. 보통 주인공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인 경우, 대부분 위인 혹은 영웅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 <빌리 엘리어트>, <슈퍼스타 감사용> 등의 수많은 예시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촌스러운 여성형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네 영화들의 여성 재현은 어떠한가? 강의는 <용순>과 <옥자>, <악녀>와 <미옥>을 각각 묶어서 설명한다.



 <용순>의 용순(이수경)의 이름의 유래는 “용 ‘용’에순할 ‘순’, 엄마가 용순을 낳을 때 용썼다고 해서 용순’이라고 설명된다. 영화는 출산의 과정을 이름으로 삼은 한 청소녀가 계속하여 달리면서 여러 고민들을 드러내고 결말을 맺는 과정을 담아낸다. <용순>의 용순은 거침없다. 체육선생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친구들과 저돌적인 전략들을 펼치고,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그들에게 저항 또는 상대한다. 그러나 영화는 용순의 저돌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사춘기 시절의 철없음, 혹은 어느 시골 풍경 속의 아련한 그 시절 정도의 수준으로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봉합, 어른인 새엄마의 개입과 영화 내내 부재하던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방식은 용순의 철없음 혹은 사춘기 시절이라는 한 때로 용순의 행동을 정의 내리며 그녀의 적극성을 희석시킨다. 결국 용순은 ‘순’이라는 이름 그대로 순응하는 순한 여성이 되어 영화가 마무리되고 만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사춘기 소녀의 이름이 용순이라니, 작명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감성과 어떤 향수가 바로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옥자>의 미자(안서현)는결국 옥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거대 기업인 미란도를 상대로 말이다. 강의에서는 이러한 미자가 아직 여성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아직 톰보이적인 면모를 보이는 아동기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용순이 청소녀로써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캐릭터였다면, 미자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남성성(액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캐릭터이다. 동시에 미자와 옥자의 관계는 여성연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서로가 엄마이자 딸리고 친구이자 연인인 일종의 대안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미자와 옥자라는 이름과 둘의 관계, 최종적으로 미자가 옥자를 구출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결말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한국의 여성들이 부여받은 이름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을 통한 신식민시대의 기업과 어른들과 싸워 이긴다는 서사가 <옥자>의 서사이다. 미자와 옥자라는 여성형 이름은 겉으로는 구별되기 어려운 둘의 성별을 여성으로 상정하면서 둘의승리가 지닌 순수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욕망을 여성(루시&낸시 미란도 - 틸다 스윈튼)으로 표현한 것, 서구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오리엔탈리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구도, 어떠한 문제제기나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까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용순>과 <옥자>는농촌 소녀들의 촌스러운 이름을 통해 (아마도 연출자인 남성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노스탤지어를 드러내고, 다가온 테크놀로지 시대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의 순수성과 촌스러운 이름에서 드러나는 과거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악녀>와 <미옥>의 테마는 상당히 유사하다. <악녀>의 숙희(김옥빈)는 조선족 출신의 킬러로 중상(신하균)에게 버림받고 한국 국정원의 암살요원으로 일하며 중상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키우다가, 딸과 사랑하는 남자 현수(성준)를 모두 잃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옥>은 조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키운 나현정(김혜수)이 은퇴를 원하면서 상훈(이선균)과 최 검사(이희준), 보스인 김 회장(최무성) 등과 얽힌 관계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을 그린다. 당연하게도 현정에겐 김 회장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숙희와 미옥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성을 동력으로 삼는 복수심이다. 숙희는 딸을 잃고, 미옥은 아들과의 삶을 꿈꾼다. 두 캐릭터 모두 자식에 대한 모성애, 연애대상(?)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 아늑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제공되는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등을 보여준다. 극대화된 육체적 능력을 지닌 이 캐릭터들이 기어이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으로 봉합되는 가부장제적 정상가족이다. ‘여성 중심 액션 영화’를 표방하고 그렇게 마케팅을 해온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사랑과 모성 없이는 전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모양새다. <악녀>는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과 같은 전근대적 여성 잔혹사의 연장선이고, <미옥>은 오롯이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현정을 그려낸다. 특히 <미옥>은 여성에 대핸 성적 대상화와 모성이라는 테마, 액션 누아르라는 장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녀/창녀의 단순 이분법 속에서마저 길을 잃은 채 내러티브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두 영화 모두 강인하고 육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설정해 놓고 모성을 강제적으로 주입하여 탄생한 괴작이다.



 물론 두 영화는 백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다. <악녀>에는 숙희의 상사 권숙(김서형)이 등장하고, <미옥>에는 현정의 밑에서 일하는 웨이(오하늬)가 등장한다. 하지만각각의 캐릭터 역시 모성과 가부장제적인 이성애 시스템이라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 그 밖으로 주인공을 탈출시킬 수 있는 서사를 보여주진 못한다. 결국 두 영화는 남성화된 상업영화계가 지닌 상상력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과거 할리우드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이리언> 시리즈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 2>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등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두 캐릭터 모두 여성이지만, 남성성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총으로 침략자(외계인, 로봇)를 처치한다. 동시에 두 캐릭터에게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는 <악녀>나 <미옥>이 지닌 한계점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두 캐릭터 모두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캐릭터이며, 한국의 두 영화보다 성공한 이유는 더욱 촘촘한 내러티브와 이를 구현하는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 액션 영웅이라는 존재는 그간 남성성으로 대표되어 온 육체적인 액션을 선보이는 캐릭터이지만, 그들이 강인함이라는 남성성을 지니게 될 경우 모성과 이성애라는 한계를 반드시 두게 된다. 결국 그들이 어떤 개인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욕망, (모성 같은 것을 제외한)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욕망은 그들이 남성성(액션)을 획득함으로써 거세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성과 (남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이성애를 전면화함으로써만 그들이 지닌 남성성을 전면화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또한 숙희와 현정은 리플리나 사라 코너에 비해 섹스어필이 상당히 강조된다. 80년대 하드 보디 액션 영화의 광풍이 휩쓸고 난 뒤인 90년대 <니키타>나 <지. 아이. 제인> 등의 여성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여성 액션 영웅들은 ‘남성 되기’와‘섹스어필’의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하게 된다. 리플리와 사라 코너가 아이코닉한 이유는 이러한 전략에서 섹스어필을 배제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숙희와 현정이 보여주는 남성 되기와 섹스어필의 투 트랙 전략은 기본의 남성/여성의 젠더 역할만을 공고히 할 뿐, 진정한 여성 액션 영웅이 등장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만이 이러한 구도 사이에서 여성연대를 이끈 강력한 여성 영웅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강의에서 언급한 것은 퓨리오사까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원더우먼>의 원더우먼을 살짝 끼얹어 보고 싶다. 물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캐릭터가 전개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악녀>와 <미옥>은 충무로가 여성 영웅을 원하는 여성 관객들의 욕구와 페미니즘의 조류의 편승하고자 하는 제작사들의 욕망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낸 신호 이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악녀>와 <미옥>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숙희와 현정은 극 중 이름이 두 가지라는 점이다. 숙희는 국정원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채연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나현정은 미옥이라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과거의 상처 속에 묻어둔다.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을 지닌 개인을 비롯해 가족, 사회, 지역 등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다른 정체성, 관계 등을 재정의한다는 의미이다. 숙희는 채연수라는 이름을 통해 가부장제적 국가 시스템(국정원) 안으로 편입되었고, 미옥은 나현정이라는 이름을 통해 남성화된 조직에 편입된다. 숙희와 미옥이라는 기존의 이름은 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두 인물은 가부장제에서 배제된 주변인으로써의 호모 사케르로 존재했다. 마치 조선시대의 여성들처럼 말이다. 성이 포함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채연수와 나현정은 국가기관과 유사기업이라는 남성적인 가족의 이름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이름에는 숙희와 미옥이라는 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있는 기존의 이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파국을 맞이하는 두 이름은, 게다가 숙희와 미옥이라는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이름이 아닌 현대적이며 덜 여성적인 이름은 실패한 이름/캐릭터가 된다. 두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이름은 모성/이성애라는 가부장제적 장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적 욕망을 위해 행동할 수 없도록 서사를 구조화하는 상상력의 집단적 태만이다.

 

 결과적으로 <용순>, <옥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 노스탤지어와 <악녀>, <미옥>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모성, 이성애라는 한계는 공교롭게도 네 작품의 연출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팩트와 연결된다. 각 남성 감독이 스스로 각본을 쓴 네 개의 작품은 그들이 지닌 상상력의 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은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랄까? 여성적 욕망은 무엇일까? 남성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성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탐구하고 상상하지 않는 지금의 태만이 시대착오적인 이름들을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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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최대한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MCU의 클라이맥스이자 종착점, 혹은 반환점과도 같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마침내 개봉했다. 예상대로 엄청난 숫자의 스크린을 점령하면서 온갖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스포일러 대란이 일어났고, 박지훈 번역가의 오역 논란은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피니티 워> 광풍 속에서, 지난 10년간 즐겁게 MCU 영화를 즐겨왔던 기억과 함께 개봉일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안 되어 (드디어) 사망하는 로키(톰 히들스턴), ‘인피니티 워’라는 부제가 공개되었을 때부터 죽음이 예측됐던 비전(폴 베타니)의 (무려 살려내서 다시 한번 죽이는) 죽음, 포스터에 등장한 캐릭터 중 절반 가량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엔딩은 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줌과 동시에, 올해 6월 말 개봉할 <앤트맨 앤 와스프>, 내년 3월 개봉할 <캡틴 마블>, 그리고 내년 5월에 다시 돌아올 <어벤져스4>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최근 MCU를 보면 볼수록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19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온 세계관을 즐긴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MCU를 보는 관객이 즐기는 것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거대한 드라마를 극장에서 개봉하는 성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앞서 개봉한 <블랙팬서>의 경우 블랙 프라이드를 스크린 위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낸 사례이기에 한 편의 영화로서 가치와 흥미를 이끌어내지만, 그 밖의 다른 영화들에는 의문부호만 붙고 있다. 이젠 각 캐릭터들이 데뷔하는 첫 영화(가령 <닥터 스트레인지>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아니고서야 해당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덤을 10년 넘게 유지시키면서, 가공할 흥행을 이끌어내는 충성심을 길러냈다는 것이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캐릭터성 밖에 없는 캐릭터 

 <인피니티 워>는 각기 다른 트랙을 달려온 캐릭터들이 하나의 이벤트로 뭉치게 된 MCU라는 드라마 시즌1의 피날레이다. 그도 그럴게, <인피니티 워>에서의 어벤져스 캐릭터 묘사는 전편들을 보지 않았다면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뿐더러, <인피니티 워> 속의 캐릭터들에겐 제대로 된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노스(조쉬 브롤린)의 등장이라는 사건은 여러 슈퍼히어로들을 움직이게 만들지만, 여기서 각 캐릭터들의 동선과 감정선은 타노스의 행동에 대한 리액션일 뿐이다. 앞선 어벤져스 영화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러한 단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어벤져스>에서는 로키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아이언 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블랙위도우(스칼렛 요한슨), 헐크(마크 러파로), 호크아이(제레미 레너) 등 6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캐릭터들이 하나의 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어벤져스>에는 캐릭터가 많이 않았기에 각각의 캐릭터들이 소개된 첫 영화들을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여기에 <인크레더블 헐크> 이후 헐크 역의 배우가 에드워드 노튼에서 마크 러팔로로 변경되었다는 점은 <어벤져스>가 불가피하게 다시 한번 캐릭터를 소개해야 된다는 과제를 부여하기도 했다. 여기에 블랙위도우, 호크아이 등 개별 영화가 없던 캐릭터들에겐 전사를 부여하면서 캐릭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로키의 헬리캐리어 습격으로 캐릭터들을 흩어 놓은 뒤 뉴욕 전투에서의 협동으로 귀결되는 서사는 어벤져스라는 팀에 단일한 서사를 부여하면서 성공적으로 어벤져스라는 팀을 만들어낸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어벤져스>에서 완성된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퀵실버(애런 테일러 존슨),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 비전 등 새로운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각 캐릭터의 서사와 개성을 만들어낸다.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이라는 빌런의 맹목적인 목표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어벤져스라는 팀 캐릭터 속에 스며들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인피니티 워> 역시 로키나 울트론처럼 타노스라는 단일한 적을 통해 20명이 넘는 캐릭터를 하나의 서사로 엮으려 한다. 그러나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된 배경은 그들을 단번에 한 공간으로 모으기 어렵다. 때문에 아이언 맨,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스파이더맨(톰 홀랜드), 스타로드(크리스 프랫), 맨티스(폼 클레멘티에프) 등은 타이탄 행성, 토르, 로켓(브래들리 쿠퍼), 그루트(빈 디젤)를 니다벨리르로 향하는 여정,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세바스찬 스탠), 블랙팬서(채드윅 보스먼), 스칼렛 위치, 블랙 위도우 등이 비전을 지키기 위해 와칸다로 각각 나뉘어 영화가 진행된다. 어벤져스라는 한 팀으로 묶여 단일성을 지닌 한 팀이 아닌,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축으로 나뉘어 서사가 진행된다.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이야기를 풀어낼 시간은 149분의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부족하고, 영화는 그저 앞선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캐릭터들을 끌어와 반복한다. 싸움에 임하는 각각의 동기도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좀처럼 하나의 서사로 묶이지 않는다. 가령 토르는 로키와 아스가르드인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싸우고, 블랙팬서는 단순히 와칸다를 비롯한 지구를 침략한 적에 맞서기 위해, 아이언 맨은 로키의 뉴욕 침공에서부터 쌓인 한을 풀기 위해, 스타로드는 가모라(조 샐디나)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노스에 맞선다. 결국 이들에겐 공통의 적만 있을 뿐 공통의 서사는 없다. <인피니티 워> 속에서 성장, 발전 등 익숙한 슈퍼히어로 서사는 없다. 타락, 추락 등 그 반대로의 서사 또한 없다. 업그레이드된 슈트나 무기가 캐릭터의 성장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20명이 넘는 어벤저들은 각자가 기존의 보여줬던 모습만을 반복하고, 그것은 죽음 또는 상실이라는 결말로 귀결된다. 결국 어벤져스의 서사에는 타노스라는 발단과 죽음/상실이라는 결말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피니티 워>라는 한 편의 영화 안에서 기승전결의 완결되는 서사를 지닌 캐릭터는 타노스 한 명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어벤져스가 아닌 타노스로 생각하고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면, 이 영화는 타노스라는 주인공이 우주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어벤져스라는 빌런을 상대하는 다크 히어로 영화가 된다. 영화 속 모든 캐릭터의 출연 분량 중 절반 가까이를 타노스가 가져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제목을 <타노스: 인피니티 워>로 바꾸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를 연출한 루소 형제는 타노스에게 다양한 서사를 부여하며 그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가령 그의 행성인 타이탄은 인구 과잉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멸망했고,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생명의 절반을 죽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내거는 순간 타노스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마이클 키튼) 등의 빌런과 유사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소울 스톤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모라와의 부녀 이야기는 타노스에게 아버지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다양한 면모를 부각하려 한다. 때문에 가모라라는 캐릭터에게 기존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전사가 추가되긴 하지만, 결국 타노스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타노스에 대한 리액션으로서 가모라의 서사가 구축되는 모양새가 된다. 여기에 타노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가모라의 최후와, 추락하는 가모라와 눈물 흘리는 타노스의 얼굴을 디졸브(심지어 MCU 전체에서 디졸브는 찾아보기 어렵다)로 담는 편집은 타노스의 서사를 위해 가모라라는 캐릭터를 황망하게 희생시켜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타노스의 캐릭터로 영화가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피니티 워>라는 이벤트를 영화화할 때의 한계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코믹스 이벤트 [인피니티 건틀렛] 또한 타노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MCU는 코믹스가 아니다. 러닝타임이 어찌 됐든, 등장하는 캐릭터가 몇이든, ‘어벤져스’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인피니티 워>는 분명 어벤져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 영화이다. 타노스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과도한 분량과 서사를 부여하고, 기존의 캐릭터들을 단순하게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허망하게, 그것도 매우 짜증 나는 방식으로 몇몇 캐릭터를 소비해버린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간 MCU가 받아온, 빌런이 약하다는 지적에 대한 가장 뒤틀린 방식의 대응이 아닌가 싶다. 빌런을 강화하기 위해 전체 비중의 절반 가까이를 할애하고, 캐릭터를 희생시켜가면서 캐릭터를 구축한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모로 효과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강조해야 할 주인공인 어벤져스에 실릴 힘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모두가 빌런을 기억하는 여러 영화들, 가령 <다크 나이트>나 <양들의 침묵>은 조커와 한니발의 길지 않은 등장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감을 러닝타임 내내 과시했다. 이는 효과적인 몇몇 장치, 가령 강렬한 오프닝, 여러 조연 캐릭터의 대사, 영화 속 뉴스 등을 이용한 홍보 등을 통해 가능해진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는 이러한 장치들의 과잉으로 가득하다.



클로즈업뿐인 액션 

 <인피니티 워>는 과잉의 영화다. 등장하는 캐릭터의 수부터 앞서 언급한 빌런의 과잉까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과 149분 안에 수많은 정보를 담아내야 하는 영화도 버거운 수준이다. 이를 어느 정도 정돈하고, 수많은 정보량이 정리되는 부분이 액션 장면이다. 뉴욕을 시작으로 스코틀랜드, 타노스의 우주선, 타이탄 행성, 와칸다 등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예상대로 수많은 캐릭터들의 협동과 개별적인 캐릭터들의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타이탄 전투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길을 열어주고, 스파이더맨은 거미줄로 타노스를 묶으며, 아이언 맨과 스타로드는 화기를 통해 타노스를 직접 공격하고, 맨티스는 타노스의 정신을 공략한다.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백병전으로 진행되는 와칸다 전투는 캐릭터 각각의 전투 방식을 강조한다. 방패를 이용한 캡틴 아메리카, 아크로바틱 한 근접 액션을 선보이는 블랙팬서와 블랙위도우,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공중전을 도맡는 워머신(돈 치들)과 팔콘(안소니 맥키), 염력을 이용하는 스칼렛 위치 등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액션들엔 풀숏이 부족하다. 우리는 여러 캐릭터들과 타노스가 싸우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그림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는 비행이 가능한 아이언맨을 통해 멤버들을 잇는 롱테이크를 선보이며 각 캐릭터의 개성과 전체적인 액션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은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무너지는 것만 같다. <어벤져스>의 원년멤버들만이 등장하는 오프닝의 하이드라 기지 습격 장면은 전편과 유사한 방식으로 액션의 밑그림을 그리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소코비아 장면은 익스트림 롱샷과 클로즈업만 존재하는 괴상한 구조의 액션 설계로 구성되어 있다. 비슷한 문제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공항 전투 등 비중 있는 캐릭터가 과도하게 많이 등장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홈커밍>의 선상 전투 장면이나 <토르: 라그나로크>의 바이프로스트 전투 등 액션이 주는 타격감보다 캐릭터의 개성을 강조하는 비주얼을 선택하면서 액션 본연의 쾌감이 줄어드는 문제 또한 발생한다. 카메라는 지나치게 가까이 들어가거나 지나치게 자유롭다. 캐릭터와 상대방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넓은 지역과 많은 캐릭터를 한 번에 다룬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다뤄야 한다.


 <인피니티 워>는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등장하는 인원이 적은 뉴욕이나 스코틀랜드 액션 장면은 무난하고, 몇몇 부분은 잘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타이탄이나 와칸다 장면으로 넘어가면, 여러 캐릭터들을 자랑하기 위해 근접한 위치에서 그들을 담아낸 쇼트들로 가득할 뿐이다. 특히 와칸다 장면에선 여러 캐릭터가 협동하는 모습마저 제대로 담기지 못한다. 가령 윈터솔저가 로켓을 들고 360도 돌며 근방의 적들을 쏘는 장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유사한 장면에 비해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정쩡한 위치에서 둘을 잡는 카메라는 둘의 협동 액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1.90:1 아이맥스 화면비로 촬영된 이 영화를 2.39:1의 화면비로 상영되는 일반관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어정쩡함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아이맥스 관에서 관람하고 나니 애초에 어정쩡하게 촬영된 장면임을 알 수 있었다. 적과 싸우는 스칼렛 위치를 블랙위도우와 오코예가 협동하여 구하는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위치가 불분명한 캐릭터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액션을 펼친다는 점이다. 타이탄 장면에서 타노스에 대한 맹공이 쏟아질 때,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던 맨티스가 등장해 타노스의 정신을 컨트롤하려 한다. 그전에 마찬가지로 위치가 불분명한 드랙스(데이브 바티스타)가 어디선가 나와 타노스의 다리를 공격한다. 각 캐릭터들이 타노스를 붙잡고,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이 건틀렛을 벗기려는 장면에서 스타로드의 돌발행동과 함께 맨티스의 정신 공격이 무력화된다. 다시 움직이는 타노스에 의해 캐릭터들이 내동댕이쳐지는데, 앞의 쇼트에서 보이지 않던 닥터 스트레인지가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과연 그는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날아가버린 것인가? 마찬가지로 오코예와 블랙위도우의 합동 액션에서, 그들의 구출 대상이었지만 외화면으로 실종되어 버린 스칼렛 위치가 난데없이 적을 날려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인피니티 워>는 수많은 캐릭터들을 이렇게 갑툭튀 시키는 방식으로 후반부 액션들을 전개해나간다.  


누구를 위한 아이맥스인가 

 <인피니티 워>는 영화 전체가 아이맥스로 촬영된 최초의 블록버스터이다. 아리 알렉사 아이맥스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이 영화는 1.90:1의 위아래로 넓은 화면비를 자랑한다. 기존의 영화들, 가령 <블랙팬서>나 <시빌 워> 같은 작품들 역시 아이맥스로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몇몇 부분뿐이었다. 이렇게 일부분만 아이맥스로 촬영된 작품들은 일반관과 아이맥스관에서 동일하게 본래의 화면비(2.39:1)로 상영되고, 아이맥스로 촬영 혹은 컨버팅 된 장면들에서 컷이 넘어가거나 위아래가 슬그머니 늘어나면서 1.90:1의 화면비로 변경된다. 때문에 전체적인 영화 속 쇼트의 구성들은 2.39:1의 화면비에 맞춰지게 되고, 1.90:1 화면비의 화면은 일종에 보너스 같은 개념이 된다. 


 반면 <인피니티 워>는 모든 쇼트가 1.90:1의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같은 화면비를 소화할 수 있는 상영관은 아이맥스관뿐이다. 일반적인 상영관에서 <인피니티 워>는 2.39:1의 화면비로 상영된다. 이러한 선택은 본래 화면의 위아래를 크롭한 판본이 일반관에서 상영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1.90:1의 화면비를 기반으로 쇼트의 구도와 스케일을 맞춘 <인피니티 워>의 영상들은 일반관에서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많은 장면에서 화면의 위아래가 잘림으로써 발생하는 어정쩡함을 느낄 수 있는데, 가령 블랙오더가 탄 우주선이 뉴욕에 도착하는 장면이나, 대화 장면에서 타노스를 미디엄숏으로 잡는 장면, 모르도르 행성에서 소울 스톤을 구하는 장면 등이다. 아이맥스 화면비에서 온전하게 그려지던 이 장면들은, 일반관에서 상영되는 화면비에선 블랙오더의 우주선은 절반 가량이 화면에서 잘려나가고, 타노스를 잡는 미디엄숏에서 타노스의 이마가 잘려나가고, 소울 스톤이 숨겨져 있는 제단과 같은 장소는 그 스케일이 온전히 담기지 못한다. 이 장면들뿐만 아니라 여러 액션 장면, 몸집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타노스와 다른 캐릭터들의 대화 장면, 보르미르 비롯해 타이탄, 노웨어, 니다벨리르 등의 거대한 우주공간과 와칸다 등 광활한 지역을 담아내는 많은 숏은 일반관에서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작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이 선보인 1.43:1 화면비를 일반관에서 경험할 수 없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객이 아이맥스 관에서 <인피니티 워>를 관람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답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내 18개 관 밖에 없는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지금처럼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인피니티 워>의 관객들을 소화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영관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높은 가격(이번 가격 인상으로 인해 평일 저녁 아이맥스관 가격은 18000원으로 올랐다), 지역적 한계 때문에 극도로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조조부터 심야까지 매진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써 아이맥스 관에서의 <인피니티 워> 관람은 더더욱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상영에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로 촬영하고, 숏의 구도를 그 화면비에 맞추어 일반관에서의 관람을 온전하지 못한 경험으로 남기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에 의문이 든다. 1.43:1과 2.20:1의 극단적인 화면비 차이를 보인 <덩케르크> 또한 관객의 관람 경험을 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영화였다. <인피니티 워>의 경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5월 2일) <인피니티 워>를 관람한 625만의 관객 중 아이맥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2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관람객의 25분의 1 정도만이 아이맥스를 통한 온전한 <인피니티 워> 관람을 한 것이다. 결국 <덩케르크>나 <인피니티 워>가 취하고 있는 아이맥스라는 포맷은, 그것이 지닌 영화적 효과와 성취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수의 대중이 아닌 예매 전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관객을 위할 뿐이다.



 그래서 <인피니티 워>는 관객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강력한 충격요법은 앞으로 개봉이 예정되어 있는 세 편의 MCU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고, (어벤져스의 입장에서) 미완성의 서사로 끝나버린 영화는 관객들이 하염없이 1년을 기다리게 만든다. 관객들이 MCU에 가지고 있는 충성도는 이제 폭발 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피니티 워>는 MCU의 세계관이 점점 거대해지고,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발생하는 한계점을 여실 없이 드러내는 작품으로 느껴졌다. 물론 <인피니티 워>는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자, 10년간 MCU를 지켜봐 온 오랜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이벤트이긴 하다. 그러나 서사적으로, 수많은 캐릭터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안일하게 만들어지는 액션의 모습에서 일정 부분 한계점에 봉착해있다. <인피니티 워> 직전에 개봉한 <블랙팬서>는 같은 세계관 안에서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지 시도하고 일정 부분 성공한 작품이었다. <인피니티 워>는 “우주는 유한하다”는 타노스의 대사처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어벤져스의 절반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엔딩을 보고 있자면, 절반을 죽여 균형을 맞춘다는 아이디어는 타노스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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