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DF'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리처드 링클레이터만큼 시간이라는 관념을 작품 내외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이 있을까? 그는 작품 사이 9년의 간격을 두고 18년 동안 공개된 <비포> 트릴로지와 12년의 시간을 담은 <보이후드>를 만들었다. 링클레이터의 힘 있는 기획력과 한 편의 작품을 위해 뭉치는 영화 공동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루이스 블랙과 카렌 번스타인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리처드 링클레이터: 꿈의 연대기>는 1991년 <슬래커>로 데뷔한 링클레이터의 영화관을 정리한다. <스쿨 오브 락>과 같은 한 두 작품을 제외하면 링클레이터는 할리우드 자본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할리우드와도 떨어져 있고, 저예산 영화 촬영이 용이한 오스틴에서 링클레이터는 영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영화 속에서 시간을 담아내듯 링클레이터가 영화를 만들어온 시간을 담아낸다. 그 시간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링클레이터의 영화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영화가 공동창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캐스팅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공동창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하듯, 링클레이터는 독단적으로 영화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캐릭터를 창조해낸 뒤 배우와 기술 스탭을 장기말처럼 쓰는 감독이 아니다. 그에겐 영화가 기획되고, 스탭과 배우의 캐스팅이 진행되며, 영화 촬영 현장까지 이어지는 창작의 시간까지 영화의 일부분이다. 그가 오스틴에서 영화를 처음 만들던 때부터 <보이후드>와 <에브리바디 원츠 썸!!!>을내놓은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공동창작예술로써의 영화”라는 태도와 시선은 그 자체가 영화로써 기능한다. <멍하고 혼돈스러운>이나 <서버비아> 같은 작품들이 특정한 주인공 없이 한시적인 시간대를 담아내는 작품인 것도 이러한 링클레이터의 창작과정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오스틴에서의 어느 시간대를 잘라와, 패션과 음악, 행동양식까지 시대와 캐릭터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한시적으로 모여 영화를 만들고 흩어지는 영화 공동체와 비슷한 형식을 띤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꿈의 연대기>는 링클레이터가 지닌 방대한 아카이브를 활용한다. 링클레이터의 영화 클립과 잭 블랙,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메튜 맥커너히 등 여러 배우의 인터뷰는 물론, 링클레이터가 영화를 제작하면서 쓴 메모, 심지어 가계부까지 영화에 등장한다. 이는 영화의 연출자인 루이스 블랙이 링클레이터가 오스틴 필름 소사이어티를 창립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때문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꿈의 연대기>를 제작하는 것 또한 링클레이터의 영화들처럼 시간을 담아내는 작업이 된다. 영화는 평면적으로 한 인물의 연대기를 쫓아가는 대신 링클레이터의 영화 작법을 다큐멘터리에 적용한다. 그렇기에 9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관객은 링클레이터의 영화 세계와 태도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집을 읽고 [검은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쓰는 소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프랜신 밸런타인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캐나다 토론토 북동쪽에 위치한 임대주택단지에서 살고 있다. 프랜신과 그의 가족, 이웃들은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열두 살인 프랜신은 글을 쓰고, 시를 쓰고, 음악을 만든다. 포의 소설을 비롯한 책을 읽고, 바스키아의 미술작품을 본다. 지역 문화센터의 선생은 프랜신의 글을 음악으로 만들어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프랜신의 아버지는 차고에서 레게를 연주해주는 등 지역의 어른들은 프랜신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예술을 가르쳐준다. 아이들은 음악, 시, 미술, 춤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표현하고 기록한다. 극영화를 연출하던 찰스 오피서의 두 번째 극장용 장편 다큐멘터리인 <나의 시, 나의 도시>는 프랜신을 따라 예술교육의 중요성과 재건축을 앞둔 지역의 초상을 담아낸다.



 <나의 시, 나의 교시>는 개인 개인에게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4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와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프랜신은 결핍과 가난, 재건축이라는 불안정함 사이에 놓여있다. 이러한 처지의 프랜신에게 문화센터와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이 제공하는 예술교육과 체험의 시간들은 프랜신에게 목소리를 주고, 목소리를 낼 수단을 주고, 목소리를 낼 자신감을 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부터 넬슨 만델라의 글까지 다양한 글을 읽고, 어디에나 그림을 그렸다는 바스키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림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체험들은 프랜신이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 프랜신을 비롯한 지역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시를 비트 위에 실어 포에트리 슬램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 문화센터의 도움으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게 된 프랜신은 처음엔 작은 소리로 자신의 시를 노래로 옮긴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프랜신은 자신의 시를 이전보다 자신 있게 노래로 옮긴다. 이과정을 극영화의 리듬으로 스크린에 옮기는 찰스 오피서의 연출은 프랜신을 성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려낸다.



 영화 사이사이 카메라에 담기는 임대주택단지의 모습은 재건축을 앞둔 마을의 모습이다. 프랜신은 재건축 때문에 이사가야 하는 주민들이 모여 시 당국의 설명을 듣는 자리에도 참석한다. 재건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는 “어딜 어린애가 이런 곳에 와?”라고 할 법한 자리에 프랜신은 참석한다. 프랜신은 “예술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말한다. 어느 측면에서 이는 맞는 말이다. 재건축으로 인한 이사와 최소 4년은 다른 지역에 살다 돌아와야 한다는 통보, 현재 거주하는 임대주택에 비해 높아질 새로 지어지는 빌라의 월세는 예술이라는 것으로 회피할 수 없는, 다가오는 현실이다. 그러나 프랜신과 지역 청소년들이 이어가는 예술은 그들이 계속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창작물은 위대하진 않을지라도 소중하다. 보편적 예술교육은 어째서 필요할까에 대한 답이 <나의 시, 나의 도시>에 담겨있다. 프랜신의 소중한 창작물은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인도 콜카타에 사는 무슬림 여성 라지아 샤브남은 인도의 첫 여성 코치 중 한 명으로 국제심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역의 십대 무슬림 소녀들에게 복싱을 가르친다. 그러나 라지아가 복싱을 시작하던 때와 십대 소녀들이 복싱을 배우는 지금의상황은 사뭇 다르다. 라지아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복싱을 배울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가족의, 지역의, 학교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폭행과 인도에 만연한 성차별, 성폭력의 위협까지 모든 것이 그들을 향해있다.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에서 무슬림은 소수자이며, 복싱을배우는 아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고, 사회안정망은 없다시피 하며 가족조차 그들을 지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복싱을 하는 이유는 뭘까?



 라지아라는 이름의 뜻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에게 복싱을 배우는 아이들이 안전하고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싱을 가르친다. 다만 아이들의 꿈은 복싱에 대한 열망을 가졌던 라지아의 꿈과는 조금 다르다. 아이들이 복싱을 하는 이유는 꽤나 현실적이다. 대회에서 입상하여 취직을 하기 위해, 자신들을 향한 직접적인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복싱을 배운다. 혹은같은 이유를 위해 복싱을 그만두기도 한다.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라지아는 정신적/신체적으로 힘을 길러 여성에 대한 편견과 맞서 싸울 것을 가르친다. 복싱을 배우면서 강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성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한 학생의 모습은 라지아의 가르침이 아이들을 어떤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보여준다. 라지아의 지도 하에 아이들은 서벵골 최고의 복싱 선수로 자리잡는다.



 알카 라구람의 카메라는 이러한 모습들을 우직하게 담아내어 단단하게 엮는다. <부르카 복싱>의 이야기는 복싱을 배우는 소녀들의 성장드라마이다. 복싱 훈련하는장면과 인터뷰 등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되고, 복싱 경기에 나가 입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안정감 있게 인물들을 담아내고 인터뷰를 전달해내는 촬영과 편집은 아이들에게 복싱이 주는 의미, 복싱을 해야 하는 이유, 그 결과물로써 현재의 자신을 보여준다. 인도 사회 속 여성/육체적으로 강인한 여성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여성들이 왜 강해져야/강해질 수 밖에 없는지를 생각하고 내화하는과정을 담은 인터뷰와 복싱훈련/경기 장면이 교차편집 되는 장면은 잘 짜인 성장영화 한 편을 보고 난것과 같은 감상을 남긴다. 천을 염색할 때 쓰는 염료를 서로에게 뿌리고 물총놀이를 하며 웃는 마지막장면의 아이들은 편견 밖에 위치한 것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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