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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 상업영화는 아마 <국가부도의 날>이 처음일 것이다. 장편 데뷔작 <스플릿>으로 볼링이라는 소재에 도전했던 최국희 감독은 다시 한번 쉽지 않은 소재를 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남아있는 IMF사태 직전의 일주일을 다룬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의 한시현(김혜수), 금융투자회사에서 일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는 윤정학(유아인), 국가부도사태를 통해 권력을 탐하는 재정부 차관(조우진), 공장을 운영하는 소시민 갑수(허준호)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경제위기를 예측한 사람과 이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쇼트>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블랙코미디 대신 진지한 드라마를 선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기본기에 충실하다. 한시현과 재정부 차관 등이 자리한 회의 장면과 어음으로 계약하는 갑수, 자신의 고객들에게 위기가 기회라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윤정학의 모습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되며 97년 당시의 상황을 관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한다. 물론 계속 쏟아지는 경제용어들이 지닌 진입장벽은 있지만, 여전히 IMF사태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나 현재의 경제 불황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면에서의 교차편집은 영화 전체로 확대된다. 한시현, 차관, 윤정학, 갑수의 상황이 번갈아 가며 제시되고, 국가 전체의 침몰로 이들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갑수의 상황에 많은 관객들이 가장 몰입할텐데, 그가 대표하고 있는 소시민의 상황은 대다수의 관객들이 경험했던, 혹은 간접적으로 보고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허준호의 연기는 온몸으로 당시의 상황을 받아내고 있다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빚을 갚지 못해 수감된 동료를 면회하고 온 갑수가 거리를 걷는 장면은 (아마 90년대 느낌이 남아있는 어느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겠지만) 현재의 거리에 97년의 갑수가 당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CG 등으로 배경 전체를 덮어 씌우는 대신 현재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IMF사태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역시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이다. 한시현의 행보는 종종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남초 사회인 재계,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시현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여성 영웅으로써의 한시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는 현실 때문에 한시현이 금융위기를 막는 서사로 나아가진 못하지만, 그와 같은 인물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가올 위기에 맞설 미약하지만 필요한 용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시현을 한국영화 속 여성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의 특별한 인물과의 만남이라던가, “계집애는 어쩔 수 없다”라는 재정부 차관의 성차별적 발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이어가는 장면은 한시현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그가 자신의 팀원들과의 연대적 관계에도 주목해 볼만하며, “여자들은 감정적이어서 안 된다”는 남성 캐릭터의 발언과 대비되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감정적인 남성들과 이성적 협상을 우선시하는 한시현의 대비도 적절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유아인의 연기다. 그가 연기한 윤정학은 분석력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캐릭터인데, 그의 캐릭터는 최대한 이성을 붙잡으려는 한시현 캐릭터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굉장히 감정적인 이 캐릭터는 종종 과잉의 순간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아인이 연기하는 과잉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베테랑>의 조태오 이후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들에서 조태오스러움을 반복적으로 발견하고 있다. 과잉된 연기가 그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캐릭터로 남은 것 같은 인상이다. 때문에 차분하게 쇼트를 쌓아가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홀로 감정과잉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선보이는 유아인의 연기는 완벽한 에러다. 김혜수와 허준호를 비롯해 조우진, 류덕환, 권해효, 박진주, 그리고 뱅상 카셀 등의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영화의 톤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다르게 유아인은 홀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러한 괴리감이 에필로그에서의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연기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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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지사로 일하고 있는 백상아(한지민)는 추운 겨울날 우연히 골목길에서 혼자 떨고 있는 김지은(김시아)을 발견한다. 상아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던 지은에게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사주지만, 이내 지은의 보호자라는 주미경(권소현)이 나타나 지은을 데려간다. 지은의 몸에 난 상처와 멍을 보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상아는 미경과 지은의 친부인 백수장(김일곤)의 폭력에서 지은을 구하고자 한다. 이지원 감독의 <미쓰백>은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 성인인 사람이 아동을 구출한다는 점에서 <아저씨> 같은 부류의 영화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영화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익숙한 사서를 지녔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을 만들어 낸 것은 <미쓰백>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영화 전체가 한국영화의 클리셰 안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그 주체가 여성으로 변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을 자아낸다. 특히 백상아를 연기하는 한지민의 모습은 <밀정>, <역린>, <플랜맨> 등의 최근작에서 볼 수 없었던 면모를 보여준다. 그동안 남성 감독의 영화에서 타입화 된 캐릭터를 연기해왔다면, 여성 감독의 영화인 <미쓰백>에서는 좀 더 자유롭게 연기를 펼쳐 보인다. 때문에 <미쓰백>은 그녀의 가장 다양한 연기를 만나 볼 수 있으며, 앞으로 한지민의 대표작으로 이 영화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미쓰백>은 분명 그간 쏟아져 나온 <아저씨>류의 한국영화들, 혹은 남성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들에 비해 취하고 있는 장점이 많다.



 하지만 한국 상업영화 대부분이 공유하는 단점 또한 공유하고 있다. 가령 과도하게 남성적이며 폭력적인 경찰문화와 이를 대변하는 장섭(이희준) 캐릭터, 모성애의 강조, 성노동자의 악마화, 불필요하게 적나라한 폭력 등이 <미쓰백>에도 존재한다. 특히 지은이 폭행당하는 장면들이 굉장히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도가니>나 <귀향> 같은 작품들이 비판받았던 것과 같은 지점에서, 피해사실을 전시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미쓰백>이 이러한 폭력이나 수난을 전시하려는 태도의 영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장섭 캐릭터의 존재도 아쉽다. 이렇게 남성성을 과시하며, 보조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구원자 자리를 넘보는 캐릭터가 이 서사에 필요한지 의문이다. 여기에 지은의 친부에 대해 더욱 간편하게 악마화 되는 미경의 캐릭터나, 상아가 너무나도 쉽게 용서해버리고 마는 아동폭력의 가해자 상아의 어머니 정명숙(장영남) 캐릭터는 영화가 주제로 삼은 여성 간의 연대를 동정과 연민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뿐이다.



 <미쓰백>은 분명 완성도가 아쉽고, 영화 자체를 지지하기엔 어렵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응원하게 되는 것은, 여성 감독, 여성 주연,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는 영화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를 비롯한 이경미 감독의 영화나, <마녀>, <악녀>처럼 여성 주연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각자의 이유로 폄하당하거나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미쓰백> 역시 한계점을 가득 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배우 한지민의 재발견(이라고 쓰지만 이제야 능력을 드러낼 장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과 백상아라는 캐릭터는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나 <암살>의 안옥윤과 궤를 같이 하며 흥미를 가지고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더욱 많이 등장하고 더 많은 영화가 나와야 한국영화의 클리셰라는 지겨운 틀을 깨고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미쓰백>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했으면 좋겠고, 영화 자체를 지지하지는 못해도 영화의 흥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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