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들'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2018년의 한국 상업영화는 처참했다. <신과 함께> 프랜차이즈의 두 편이 쌍천만을 달성했으나 영화 내적인 평가는 최악에 가깝고, 심지어 이 영화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흥행조차 한 적이 없다. 설날, 추석, 연말 등의 대목을 노린 100억원대 영화들은 한 주에 서너편씩 개봉 일정이 겹치며 공멸했고, <골든 슬럼버>, <인랑>, <안시성>, <창궐>, <협상>, <마약왕> 등 많은 영화들이 혹평과 함께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리틀 포레스트>나 <공작> 정도를 제외하면, 올해 한국 상업영화의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찍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반면 독립영화 씬에서는 언제나처럼 흥미로운 작품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특히 올해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약진이 두드러졌다. 극장 대신 온라인 개봉을 택한 김응수 감독의 작품들, 작년 영화제 등을 통해 소개된 <버블 패밀리>나 <집의 시간들> 등의 개봉,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소개된 <라스트 씬>, <공사의 희로애락>, <야광> 등의 작품 등 일일이 다 챙겨보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작품들이 계속 등장했다. <살아남은 아이>, <죄많은 소녀>, <영주> 등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이 개봉하여 각각 1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또한 작년에 이어 두 편의 신작을 개봉시킨 홍상수는 언제나처럼 놀라운 영화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올해 각종 영화제에서 관람한 영화, 극장 개봉작, VOD 등을 통해 온라인 개봉한 작품 중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던 작품 10편을 골라보았다. 



Best 10. <당신의 부탁> 이동은 2017 

 이동은 감독이 <환절기>에 이어 선보인 작품 <당신의 부탁>은 '어머니'를 그려냄에 있어 올해 관람한 작품 중 가장 급진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모성애만을 강조하지 않는 태도,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집이라는 공간 안에 공존하는 존재인 어머니, 연령과 상황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곳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모습 등이 주인공 효진을 비롯한 여러 캐릭터들에게 분산되어 그려진다. <당신의 부탁> 속 어머니는 자식 혹은 남편 등의 주변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희생적인 지위라는 통념과는 다르게, <당신의 부탁>이 보여주는 다양한 어머니의 모습은 생활, 삶, 욕망, 의지, 직업 등을 지닌 다층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많은 영화 속에서 무성적이면서 동시에 모성적인 존재로만 그려지는 평면적인 모습과는 다른 어머니를 <당신의 부탁>을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Best 9. <겨울밤에> 장우진 2018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장우진 감독의 신작 <겨울밤에>는 전작인 <춘천, 춘천>과 궤를 같이 한다. 단순히 춘천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 외에도, 중년 커플과 청년 커플을 유사한 타임라인 위에서 공존시키며 영화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춘천, 춘천>이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어떤 순환적인 이야기었다면 <겨울밤에>는 타임라인을 자유롭게 조작하며 벌어지는 양상들로 러닝타임을 채우고 있다. 영화의 이러한 모습은 홍상수가 <북촌방향>과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시간과 공간의 순환구조를 가장 흥미롭게 차용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Best 8. <소공녀> 전고운 2017 

 작년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 관람했지만, 개봉은 지난 3월이었던 <소공녀>는 <족구왕>, <범죄의 여왕> 등의 영화를 제작했던 독립영화 제작사 '광화문 씨네마'의 가장 최신작이다.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더 이상 공간을 점유할 수 없는 청년세대가 지닐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그려내는 작품이다. 애인, 담배, 위스키만 있으면 된다는 미소의 노마드적인 삶은 언뜻 현실불가능해 보이는 판타지처럼 느껴지지만, 영화는 동시에 과거와 노마드적 삶의 방식을 통해 연결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Best 7. <피의 연대기> 김보람 2017 

 생리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그리는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보람 감독은 생리가 역사적으로 여성을 어떻게 억압해왔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대신, '더 잘 피흘리는 방법'을 주제로 삼아 생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제목처럼 생리의 연대기를 그리고, 생리를 통해 발생하는 여성 간의 연대를 그리며, '더 잘 피흘리는 방법'을 위한 노력들을 보여준다. 생리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길지 않은 러닝타임 안에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앞으로 전국민을 위한 성교육 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적절히 배치된 음악과 애니메이션 등의 효과들과 생리에 대한 중요한 포인트들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피의 연대기>는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지식을 담고 있다. 



Best 6. <공사의 희로애락> 장윤미 2018 

 <콘크리트의 불안> 등 단편영화 작업을 주로 해오던 장윤미 감독의 첫 장편영화, <공사의 희로애락>은 건설 노동자인 아버지를 통해 기억의 기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물질적인 건축물을 손으로 만지며 노동하는 건설 노동자의 기억은, 문서화, 데이터화되며 비물질화 되는 사무 노동자들의 기억과는 다르게 건축물이라는 물질을 통해 존재한다. <공사의 희로애락>은 건설 노동자의 물질화된 기억을 영화 내에서 (재)건축하려는 시도이다. 



Best 5. <우경> 김응수 2017

 최근 김응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 개봉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최근작들은 작은 상영회나 영화제를 통해 극장에서 상영되고, VOD를 통한 온라인 개봉을 한다. <우경> 또한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공개된 작품이다. 2017년 인디스페이스 월례비행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고, 올해 <오, 사랑>, <초현실> 등의 작품과 함께 VOD 공개되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관람한 <우경>은 김응수 감독이 자신의 마사지사를 촬영한 작품이다. 우경이라는 인물의 생활을 쫓아가는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빈곤한 삶을 풍요롭게 담아내는 작품이다. 



Best 4. <클레어의 카메라> 2017

 홍상수 작년에 이어 올해도 두 작품을 내놓은 홍상수는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들을 만들었다. 칸 영화제 기간 동안 김민희,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촬영한 <클레어의 카메라>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정진영과 장미희의 두 캐릭터가 김민희의 캐릭터의 시간을 짜맞추고 이를 '정직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려 한다. 홍상수의 다른 최근작들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나 <그 후> 보다는 조금 거친 소품이지만, <클레어의 카메라>는 카메라를 통한 시공간의 탐구에 홍상수가 여전히 매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Best 3. <김군> 강상우 2018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촬영된 한 청년의 사진이 있다. 보수논객 지만원은 그를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이라 지목한다. 강상우 감독은 위의 한 장의 사진을 가지고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역사 속에서 이름이 사라진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서 호명한다. <김군>은 이 과정을 통해 (특히 보수주의자들이 중시하는) 팩트주의의 모순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소위 '팩트'라고 불리며 사람들에게 주입되는 것들은 과연 사실인가. 영화는 결국 김군을 찾지 못했다는 잠정적인 결말을 맺지만, 이를 통해 역사를 다시 써보려는 시도 자체와 새로운 역사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군>은 놀라운 작품이다. 



Best 2. <공동정범> 김일란, 이혁상 2016

 <두개의 문>의 후속작인 <공동정범>은 전작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두개의 문>이 용산참사 당시의 상황을 다층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작품이었다면, <공동정범>은 사건 이후 남은 사람들과의 연대에 주목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주요 출연자인 5명 사이의 연대가 "과연 온전한가?"라는 물음을 가지게 한다. <공동정범>이 주목하는 것은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아올려 연대를 재봉합하는 것에 있지 않다. <공동정범>이 담고자 하는 것은 '그럼에도 우리가 연대해야 함'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다시는 모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연대 대신 연대 가능성을 회복하기, 김일란과 이혁상 두 감독은 <공동정범>을 통해 연대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게 한다. 



Best 1. <풀잎들> 홍상수 2018 

 <북촌방향>으로 홍상수가 한번 분기점을 가졌었다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부터 이번 <풀잎들>까지 이어지는 김민희와의 협업은 그야말로 새로운 분기점이자 홍상수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준다. <풀잎들>은 그 정점에 서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는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김민희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관음적 시선을 통해 제시되며, 이러한 김민희의 두리번거리기는 어떤 통찰을 이끌어내는 대신 어느 곳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현재를 드러낸다. 벗어날 수 없는 폐곡선 안에서 자신의 공간을 측정하고 넓혀보려는 영화 속 인물들의 시도가 <풀잎들>을 보는 관객들과 일치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직 관람하지 못해 리스트에 포함되지 못한 영화 
<살아남은 아이> 신동석 
<오, 사랑> <초현실> <신나리> 김응수 
<야광> 임철민 
<벌새> 김보라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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