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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 실사영화가 개봉한 이후 16년 만에 스파이더맨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라는 제목으로 소니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영화는, 한 명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여러 차원에 존재하던 스파이더맨들이 한 차원에 모이게 되어 발생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2011년 코믹스에 데뷔한 흑인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의 오리진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킹핀(리브 슈라이버)이 차원 이동기를 만들어 내자, 사고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 스파이더 그웬(헤일리 스타인필드), 스파이더맨 누아르(니콜라스 케이지),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 스파이더 햄(존 멀레이니) 등이 마일즈가 있는 차원으로 오게 된다. 방사능 거미에 물려 이제 막 능력을 갖게 된 마일즈는 이들과 힘을 합쳐 킹핀의 음모를 막고자 한다.



 간단한 감상부터 말하자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존 왓츠가 MCU에서 제작한 <스파이더맨: 홈커밍>까지 모든 극장용 스파이더맨 영화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아니, 최근 경쟁적으로 각자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각종 시네마틱 유니버스들과 여러 슈퍼히어로 오리진 영화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하다. 마일즈와 삼촌 애런(마허샬라 알리)의 관계를 통해 스파이더맨과 삼촌의 관계를 새롭게 그려낸 것, 인종과 젠더의 묘사를 자연스럽게 풀어낸 것,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른 영화들에 비해 훌륭하게 풀어낸 것 등 기존의 영화들이 쉽게 풀어내지 못한 것들을 이번 영화는 훌륭하게 해낸다. 특히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코믹스 스타일의 작화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자유도를 통해 풀어낸 액션들은 황홀할 지경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앞서 언급한 과제들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낸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알고 있을 스파이더맨’들’의 반복되는 오리진 스토리를 쌓여가는 코믹스들의 이미지로 보여준다던가, 이전 실사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을 코믹스 스타일의 몽타주로 보여주는 방식, MCU가 선택한 실사화의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멀티버스의 묘사 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마지막 20여분 동안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시각적 자유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러 차원이 겹쳐지고, 그 속에서 마일즈를 비롯한 여러 스파이더맨들과 킹핀 일행이 벌이는 액션은 최근 몇 년간 개봉한 여러 편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액션 시퀀스가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스파이더맨의 소소한 행동들, 가령 벽을 타고 움직이는 장면 등 또한 가장 스파이더맨스럽게 연출된 장면이 아닐까? 경쾌한 발걸음으로 벽을 걷는다거나,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들 사이에서 어떤 실사영화에도 보지 못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스파이더맨의 주변 인물들 묘사도 뛰어나다. 마일스가 자연스럽게 흑인-히스패닉 혼혈임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사들, 스파이더맨(들)의 조력자로서 활약하는 메이 숙모의 존재, 자연스럽게 속편에 대한 떡밥을 깔아 두는 여러 캐릭터들의 등장, 각자의 사연을 통해 움직이는 피터 B. 파커와 스파이더 그웬을 비롯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지닌 가치를 더욱 올려준다. 이 놀라운 스파이더맨 영화는 현재 마일즈와 그웬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과 그웬을 비롯한 다른 스파이더우먼들이 등장하는 스핀오프가 기획 중이라고 한다. 스파이더맨의 마블로의 귀환을 반기던 팬들에게 소니가 멋진 반격을 한 것이 아닐까? 마블은 마블대로, 소니는 소니대로 각자의 스파이더맨을 계속해서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DCEU의 마지막 희망, 여성 감독이 연출한 첫 블록버스터이자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주연 작품.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슈퍼맨(헨리 카빌)과 배트맨(벤 애플렉)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시껄렁한 마무리를 맞았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간 것은 다름 아닌 원더우먼(갤 가돗)이었다. 많은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받으며 제작된 DCEU의 두 번째 솔로 영화 <원더우먼>은 결과적으로 성공이다. 전작에서 원더우먼이 보여준 에너지가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지며, 이세계에서 인간들의 세계로 넘어온 인물의 천진난만한 정의로움은 영화의 톤을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MCU의 <퍼스트 어벤저>를 연상시키는 시대 배경과 플롯이지만 훨씬 더 매끄럽고, 폴 페이그의 <고스트버스터즈>만큼 과감하진 못하지만 성역할을 뒤집는 장면들은 즐겁다. 온통 CG로 범벅된 <닥터 스트레인지>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의 가벼운 액션과는 다른 양상의 슈퍼히어로 액션은 ‘초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었지’하는 느낌을 되살려준다. 슈퍼히어로와 다른 장르를 뒤섞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다르게 정공법으로 만들어진 <원더우먼>은 정직한 재미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악평을 남기긴 했지만 저평가된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이 MCU와는 다른 결의 모습으로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면, <원더우먼>은 그것과 또 다른 모습으로 MCU와, 그리고 엑스맨 유니버스와 DCEU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원더우먼>은 MCU에서 나오기 어려운 작품이다.



 <원더우먼>과 같은 영화가 MCU에서 나오기 힘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사실 첫 여성 슈퍼히어로의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부터 (<캣우먼>이나 <엘렉트라> 같은 괴작들은 빼자) 어느 정도 차별화된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메인을 맡은 인물은 남성이고, 간혹 등장한 여성 캐릭터들(스칼렛 위치, 블랙 위도우, 스톰, 진 그레이 등)은 사이드킥 혹은 연인관계의 상대역이 되기 위해 등장한 느낌을 풍겼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킥애스>의 힛걸이나 <엑스맨> 프리퀄 트릴로지의 미스틱 같은 인물도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서사의 중심으로 나서지 못했다. 반면 <원더우먼>은 여성 중심의 슈퍼히어로 영화로써 그 역할에 충실하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데미스키라의 다인종 구성과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과 여왕 히폴리타(코니 닐슨) 등 그들이 보여주는 액션, 메인 빌런은 아니지만 신 스틸러 서브 빌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닥터 포이즌(엘레나 아나야) 등 원더우먼의 활약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은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 속 여성관을 깨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성역할을 뒤집는 지점들도 흥미롭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과감하진 못하지만 눈에 띄게 이러한 지점들을 보여준 것은 <원더우먼>만의 장점이다. 남성 캐릭터인 스티븐 트레버(크리스 파인)를 그리는 모습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트레버는 사이드킥이자 인간 세계에 원더우먼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성/여신의 목욕 장면을 우연하게 목격하는 남성의 이미지는 반대의 모습으로 영화 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동시에 원더우먼이 각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는 등 여성 캐릭터들이, 가령 <아이언맨 3>의 페퍼나 <다크 나이트>의 레이첼과 같은 캐릭터가 주로 맡아온 역할을 대신한다. 무엇보다 <아이언맨 2>의 블랙 위도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캣 우먼과 같은 아이캔디 역할이 남성 캐릭터에게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원더우먼>은 철저히 여성 중심의 서사로 구축되었음이 드러나고, <고스트버스터즈>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전장의 여성이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상당하다. 올해도 몇몇 전쟁영화가 개봉했지만, 모두 남성이 전장에서 영웅이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세계대전의 전장 속 여성을 그리는 흔치 않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원더우먼>만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짧게 등장한 원더우먼의 액션을 좀 더 많고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도 <원더우먼>의 장점이다. 전장에서의 첫 액션 시퀀스는 평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DCEU 속 초인 액션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즐거움을 준다. 팔찌와 방패로 소총과 기관총을 비롯해 박격포까지 튕겨내며 돌진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은 멋있다. 마을을 점령하는 반군을 소탕한 아이언맨의 첫 출격만큼이나 멋지다. 이 장면에서 원더우먼을 서포트해주는 트레버와 트레버의 팀은 원더우먼을 띄워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종종 슬로모션이 남용되는 듯 하지만, 심하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원더우먼 하면 가장 처음 떠오르는 무기인 진실의 올가미를 활용한 액션들은 기대 이상이다. 전작에서 맛보기로 짧게 등장한 올가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원더우먼은 자신만의 액션 트레이드 마크를 획득한다. 다만 후반부 메인 빌런이 모습을 드러낸 뒤의 액션은 타셈 싱의 <신들의 전쟁>처럼 피상적인 화려함만을 그려낼 뿐 아쉽게 느껴진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전통적인 서사를 따라가는 이야기도 만족스럽다. 슈퍼히어로 장르 서사 자체의 고질적인 단점들이 따라붙지만, 140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에 가깝다. 이세계에서 인간 세계로 넘어온 원더우먼의 천진난만함이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가운데, 그가 가진 정의의 가치관과 각성 과정이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영웅과 그의 조력자가 이끄는 오합지졸 같은 팀이 승리하는 서사는 수많은 전쟁영화를 비롯해 반복된 이야기지만, 여성 캐릭터가 홍일점이 아닌 리더가 될 때의 새로움이 <원더우먼>에존재한다. 영화 속 대사들은 소소한 재미를 주면서도 영화의 구심점이 여성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준다. 런던에 처음 도착한 원더우먼이 “싸워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자 트레버의 비서인 에타(루시 데이비스)가 “참정권이요?”라고 묻는 부분 같은 디테일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였던 원더우먼의 원작자 윌리엄 몰턴 마스턴이 원작에 담았던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결과물로 느껴진다. 잠자리와 관련된 트레버와의 대화에서 원더우먼은 “12권짜리 쾌락론을 읽었어”라며 “출산을 위해서는 남자가 필요하다지만 쾌락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하더군”이라고 대사를 날린다. 넷플릭스 영화가 아닌 1억 2천만 달러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도 드디어 이런 대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통상적인 슈퍼 히어로 장르의 단점을 제외하면 <원더우먼>은 잘 만든 슈퍼히어로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냥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 <원더우먼>의 가장 큰 단점은 영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다. 원더우먼을 연기한 갤 가돗이 강경한 시오니스트라는 것이다. 2014년 팔레스타인을 폭격해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스라엘 군의 행위를 응원하는 SNS 글을 올린 것이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고, 레바논에서는 <원더우먼>의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폭격을 옹호하는 갤 가돗이 원더우먼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할 수는 없어”라는 대사를 읊고 있는 것을 보면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가 이스라엘 군에서 2년간 복무한 것은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비인간적인 행태를 옹호한 것은 현실의 논란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영화를 감상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갤 가돗의 외모와 연기 등의 이미지는 원더우먼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비인간적 폭격을 감행하고 이에 대한 옹호 발언을 했으며 이에 대한 사과나 정정도 하지 않은 배우를 진정한 원더우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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