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블란쳇'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스포일러 포함


 2010년 첫 선을 보인 드림웍스의 <드래곤 길들이기>가 9년만에 마지막 작품을 내놓았다. 1편부터 연출을 맡았던 딘 데블로이스가 여전히 연출을 맡았고, 대부분의 캐스트들이 복귀했다. 영화는 전편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서 시작된다. 아버지 스토이크(제라드 버틀러)를 이어 버크 섬의 족장이 된 히컵(제이 바루첼)은 아스트리드(아메리카 페레라), 러프넛(크리스틴 위그), 에렛(키트 헤링턴) 등의 친구들, 그리고 드래곤의 왕 나이트 퓨리인 투슬리스와 함께 드래곤과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드래곤 라이더인 어머니 발카(케이트 블란쳇)을 따라 다른 바이킹들에게 잡혀간 드래곤들을 구조하던 히컵의 일상은 투슬리스를 노리는 드래곤 사냥꾼 그리멜(F. 머레이 아브라함)의 등장으로 인해 붕괴된다. 게다가 투슬리스는 갑자기 나타난 암컷 나이트 퓨리인 라이트 퓨리와 사랑에 빠진다. 히컵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린 시절 스토이크가 들려준 드래곤들의 세상, ‘히든 월드’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드래곤 길들이기3>는 이전에 나온 두 편의 영화가 준 즐거움을 무너트리는 작품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너저분하고, 이러한 액션만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드래곤들의 비행 장면이 주는 쾌감이 여전히 존재하긴 하지만, 전작들을 통해 익숙해진 경험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히든 월드’의 비주얼은 기대한 만큼 아름답긴 하지만, 다른 영화들에서 몇 차례는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을 준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합쳐 놓은 듯한 투슬리스의 귀여움만이 여전할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와 캐릭터이다. 라이트 퓨리와 히든 월드의 등장은 히컵과 투슬리스의 이별을 암시하긴 했지만, 그 과정이 굉장히 지루하고 종종 짜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가 인간과 드래곤을 가리지 않고 짝을 맺어주려고 안달이 났다는 점이다. 영화는 히컵은 아스트리드와, 투슬리스는 라이트 퓨리와 어떻게든 맺어지고, 자식을 낳고, 가족을 꾸린 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결말을 정해두고 그 사이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채우려 한다. 터프넛(T. J. 밀러)나 고버(크레이그 퍼거슨)과 같은 캐릭터는 밑도 끝도 없이 히컵과 아스트리드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들고, 심지어 발카는 아스트리드가 히컵의 조력자 위치에만 머물도록 돕는다. 드래곤들의 이야기는 더욱 심각하다. 라이트 퓨리는 무려 투슬리스를 잡기 위한 그리멜의 미끼로 등장한다. 투슬리스는 자신의 파트너가 등장하고 나서야 홀로 비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전편에서 강조한 우정이 주인-반려동물 관계에 가까운 주종관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전편들의 중요한 모티프는 히컵과 투슬리스가 각각 신체적 결함이었다. 둘의 관계는 그것을 서로 보완하고 봉합하며 쌓아가는 관계였다. 투슬리스라는 이름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게 거론되며 이러한 지점이 강조된다. 하지만 3편에 와서 둘은 각각 아스트리드와 라이트 퓨리를 만나고 예정된 이별을 겪는다. 투슬리스는 짝이 생기고 나서야 온전한 비행의 자유, 곧 히컵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반대로 그리멜과의 싸움에서 의족을 잃어버린 히컵은 투슬리스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아스트리드에게 지탱하여 서 있다. 이 과정에서 아스트리드와 라이트 퓨리의 캐릭터는 히컵과 투슬리스의 파트너, 둘의 이별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에 머문다. 결과적으로 두 여성캐릭터는 두 남성캐릭터의 결함을 보조, 지원해줄 뿐이다. 특히 아스트리드의 경우 1편부터 쌓아온 캐릭터성이 일정 부분 붕괴되기도 한다. 결국 <드래곤 길들이기3>는 캐릭터, 이야기, 볼거리 등 많은 부분에서 전편보다 아쉽기만 하다. 시리즈의 팬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했지만, 결국 용두사미의 마지막 편이 되었다.



 <호스텔>로 연출 데뷔하여 <케빈 피버>, <그린 인페르노>, <노크 노크> 등 호러 및 스릴러 장르를 연출해온 일라이 로스가 이번엔 전체관람가 판타지 호러 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전작 모두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며, 고어한 장면들로 가득한 영화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그의 선택은 의아하기만 하다. 배우이자 감독인 일라이 로스의 필모그래피를 어느 정도 챙겨본 입장에서도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는 어떤 작품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잭 블랙, 케이트 블란쳇, 카일 맥라클란이라는 배우들의 조합 또한 일라이 로스의 선택만큼이나 독특하다. 심지어 영화의 제작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엠블린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이쯤 되니 이 영화가 어떻게 기획되었고 일라이 로스는 어디서부터 참여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존 벨리어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루이스(오웬 바카로)가 삼촌 조나단(잭 블랙)과 그의 친구인 플로렌스(케이트 블란쳇)가 사는 집을 찾게 되고, 우연히 악의 길로 빠진 마법사 아이작(카일 맥라클란)이 집 안에 숨긴 마법시계를 통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막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익숙한 아동용 판타지 영화의 클리셰를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 또한 착실하게 따라간다. 가족을 잃은 10대,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친척의 존재, 그 친척이 숨기고 있는 비현실적인 사건과 세계 등은 <나니아 연대기>부터 시작된 익숙한 이야기이다. 일라이 로스는 이러한 익숙한 틀을 깨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등의 의욕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클리셰를 충실히 쫓아가며 전체관람가라는 제한 안에서 자신의 색을 조금씩 보여주려 한다. 고어 장면들을 대체하려는 듯이 살아 움직이는 집과 정원의 물건들이 박살 나고, 전체관람가 치고는 상당히 징그러운 장면들 또한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 대다수가 일라이 로스만의 색이라기 보단, 잭 블랙의 다른 작품인 <구스범스> 같은 영화들, 또는 <그렘린> 같은 작품에서 이미 봐온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아이작을 둘러싼 이야기는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 더 리턴>에서 카일 맥라클란이 연기했던 데일 쿠퍼 캐릭터의 이야기를 전체관람가 판타지 호러에 맞춰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아동용 판타지 영화의 클리셰에 상쇄되면서 유치해지고, 이 과정에서 영화는 힘을 잃고 만다. 사실 일라이 로스의 영화들은 초기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화가 내세우는 설정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채 갈피를 못 잡고 엔딩을 맞이하는 작품들이었다.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일등공신은 역시 잭 블랙과 케이트 블란쳇이다. 둘의 필모그래피를 비교해보면 함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둘의 캐스팅은 놀랍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둘의 합은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언제나 즐거운 코미디를 선보이는 잭 블랙과 그에 맞춰 자신의 연기를 변화시키는 케이트 블란쳇의 조합은 145분의 러닝타임을 적어도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간다. 둘이 각각 맡은 조나단과 플로렌스라는 캐릭터는 역시 익숙한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지만, 두 배우의 색이 더해져 심심하지 않은 캐릭터로 영화 속에 존재한다. 결국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를 지탱하는 것은 배우들의 힘뿐이었다. 일라이 로스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배우들 덕에 지루하지만은 않은 관람이었다.

어벤저스 원년멤버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중 유일하게 솔로영화가 아쉬웠던 토르의 세 번째 솔로영화이다. ‘라그나로크’라는 무게감 있는 제목을 가져오고 인디영화 씬에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톡톡 튀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타이카 와이티티를 영입한 마블의 선택은 적중했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잘 짜인 작품이냐,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와 같은 MCU의 베스트 중 한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망스러웠던 <토르: 천둥의 신>이나 페이즈 2의 다른 작품들보다 아쉬웠던 <토르: 다크 월드>를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틀을 깨는 선택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비주얼에 경도되어 이야기의 부실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닥터 스트레인지>나 백인 남성 중심의 코드를 과하게 집어넣어 불쾌해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이전 스파이더맨들에 비해 빈약한 액션과 어딘가 미덥지 않은 악당을 다루는 태도를 보여준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비하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제대로 깔아 둔 판 위에서 한바탕 노는, 어떤 불쾌함이나 쎄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던 토르(크리스 햄스워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오지만, 로키(톰 히들스턴)의 계략으로 힘이 약해진 오딘(안소니 홉킨스)이 죽자 죽음의 신 헬라(케이트 블란쳇)가 아스가르드를 침공한다. 헬라에 의해 추방당한 토르는 그랜드마스터(제프 골드브럼)가 지배하는 사카이르 행성에 떨어지고, 그곳에서 재회한 로키와 헐크(마크 러팔로)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전사였던 발키리(테사 톰슨)와 힘을 합쳐 헬라에게 복수한다. 단순한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유머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유머는 MCU의 다른 영화들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타이카 와이티티가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유치하지만 적중률이 높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들이 떼를 써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유치함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이러한 유치함은 명백히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한다. 가령 <파워레인저>나 <벡터맨> 같은 전대물을 보면서 느꼈던 즐거움, <울트라맨> 같은 특촬물을 보면서 느낀 즐거움이 <토르: 라그나로크>에 가득하다.



 동시에 이 영화에는 토르 시리즈에 바라던 신화적인 비주얼이 가득 등장한다. 헬라와 발키리 군단의 전투를 담은 발키리의 회상 시퀀스, 헬라가 아스가르드의 전사들과 일당백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 비프로스트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투 시퀀스 등은 북유럽 신화를 차용한 이야기에 걸맞은 비주얼을 선사한다. 동시에 <스타트렉>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같은 영화들에서 봐온 스페이스 오페라적인 함선과 도시의 비주얼, <반지의 제왕> 같은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 따온 듯한 비주얼들이 한 편에 영화 속에 꾹꾹 눌러 담겨 있다. <해리포터>의 퀴디치 월드컵 장면을 연상시키는 사카이르의 검투사 대결 장면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묘하게 BBC 드라마 <셜록>을 연상시키는 주소를 집어넣는 등의 재치는 익숙한 즐거움을 불러온다. 영화의 액션은 다소 게임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각 캐릭터의 특징에 알맞은 (특히 발키리와 헬라의 액션들은 기대 이상이다) 액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토르: 라그나로크>는 MCU의 세계관 속에 갇힌 영화이기는 하다.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줄줄이 개봉하고 있는 MCU의 영화들은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코믹스 속 어떤 장면, 가령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대격돌이나 이번 영화의 토르 vs 헐크 장면과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우는지가 마블 크리에이터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페이즈 3의 영화들이 대부분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캐스팅 혹은 비주얼적인 측면이나 기존 코드를 답습할 뿐이라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인디 b급 영화적 스타일을 적절히 차용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MCU 세계관의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는 장면들은 물론, 캐스팅에 걸맞은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면서 감독의 취향을 뒤섞은 유머와 각종 영화들에서 따온 장면들은 잡탕이 따로 없지만 어쨌거나 맛있다. 동시에 MCU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잘 쌓아 올려진 이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MCU의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토르: 라그나로크>의 장점이기도 하다.

 케이트 블란쳇이 뮤지션, 노숙자, 과학자, 노동자, 주부,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교사 등의 모습으로 공산당 선언, 플럭서스, 다다이즘, 도그마 95, 팝아트 등에 대한 선언을 장례사, 식전 기도, 엘리베이터 안내, 프레젠테이션, 수업 등의 형태로 읊는다. 원래 미술관의 멀티채널 영상 설치 작업이었던 <매니페스토>는 편집을 거쳐 러닝타임 99분의 극장용 영화로 재탄생되었다. 선언이라는 의미의 제목처럼 현대 예술/미학에 대한 중요한 예술적 선언들을 다양한 모습의 사람이 다시 한번 선언한다. 선언에 대한 선언, 선언 그 자체를 예술로써 다루는 영화는 반예술적 기조의 선언들을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통해 시각화한다. 



 상당한 분량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선언에 대한 맥락과 내용을 파악하려면 두세 학기 정도의 수업이 필요할 지경이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매니페스토 중 공부했었던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숙자에 입으로 발화되는 공산당 선언에 대한 대사, 장례식에서 장례사로 등장하는 다다 선언, 초등학교 수업으로 등장하는 도그마 95 선언 등의 장면은 흥미로웠다. 각 매니페스토의 성격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영화 속에서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과 상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달까. 사전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인물들이 한 번에 스크린에 등장해 각각의 매니페스토를 읊는 것으로 끝난다. 매니페스토를 읊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마치 교향곡처럼 구성된다. 각기 다른 음조로 매니페스토를 읊으며 그것이 음악처럼 섞이는 마지막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현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매니페스토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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