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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부산으로 원료를 수입해 가공하여 일본에 마약을 수출하던 수출왕이자 마약왕의 실화가 영화로 제작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민호 감독의 신작 <마약왕>은 70년대 독재정권 하에 마약을 통해 권력을 얻은 이두삼(송강호)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밀수를 통해 근근이 살아가던 두삼이 우연한 계기로 마약이라는 개척지를 알게 되고, 그가 이를 통해 돈과 권력을 얻은 뒤 몰락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문제는 139분의 긴 러닝타임 동안 제대로 이를 그려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약왕>은 139분의 러닝타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이두삼이 활동한 대략 10여 년 간의 시간을 담아내지만, 생략이 많은 이야기는 종종 뜬금없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두삼을 제외한 그의 주변 인물들은, 조우진, 김대명, 이성민, 조정석, 배두나, 김소진, 유재명, 이희준과 같은 현재 활동하는 정상급 배우들이 무더기로 출연하지만 이두삼을 위한 소모품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무엇 하나 제대로 그려내는 것이 없다. ‘시대의 공기를 그려냈다’라고 평해지는 다른 영화들, 가령 송강호 주연의 <JSA 공동경비구역>, <살인의 추억>, <반칙왕>, <괴물>, 심지어는 <택시운전사>와 같은 졸작보다도 시대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 사실 송강호를 얼굴로 내세워 ‘시대의 공기’ 따위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지독하게 진부하다. 범죄자를 통해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조차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보다 못하다. 더욱이 마약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올해 개봉작인 <독전>에 비해 차별화되는 부분도 없으며, <나르코스>나 <브레이킹 배드> 같은 작품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 <마약왕>의 묘사와 이야기는 뻔하고 지겹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데, 옆에 앉은 남자 관객 둘이 계속 “어, 조우진! 어, 이성민! 어, 조정석! 어, 윤제문!” 이러면서 봤다. 이 것만큼 이 영화 잘 설명해주는 상황이 없을 것 같다. 수많은 (남성) 배우들이 쏟아지지만, 그 진부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 결국 <마약왕>은 올해 개봉한 100억 원 대 예산의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실망스러운 작품이 되었다. 영화 자체의 어정쩡한 스탠스는 물론, 여성의 몸을 스펙터클화 시켜 전시하는 장면들, (만주 출신 인물이라지만) 가부장제적인 경상도 중년 남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 80~90년대 성인만화를 연상시키는 연출 등은 그저 실망스럽기만 했다. 아마 <염력>과 더불어 올해 가장 아쉬운 대자본 한국 상업영화로 손꼽히지 않을까?

 IMF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 상업영화는 아마 <국가부도의 날>이 처음일 것이다. 장편 데뷔작 <스플릿>으로 볼링이라는 소재에 도전했던 최국희 감독은 다시 한번 쉽지 않은 소재를 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남아있는 IMF사태 직전의 일주일을 다룬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의 한시현(김혜수), 금융투자회사에서 일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는 윤정학(유아인), 국가부도사태를 통해 권력을 탐하는 재정부 차관(조우진), 공장을 운영하는 소시민 갑수(허준호)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경제위기를 예측한 사람과 이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쇼트>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블랙코미디 대신 진지한 드라마를 선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기본기에 충실하다. 한시현과 재정부 차관 등이 자리한 회의 장면과 어음으로 계약하는 갑수, 자신의 고객들에게 위기가 기회라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윤정학의 모습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되며 97년 당시의 상황을 관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한다. 물론 계속 쏟아지는 경제용어들이 지닌 진입장벽은 있지만, 여전히 IMF사태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나 현재의 경제 불황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면에서의 교차편집은 영화 전체로 확대된다. 한시현, 차관, 윤정학, 갑수의 상황이 번갈아 가며 제시되고, 국가 전체의 침몰로 이들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갑수의 상황에 많은 관객들이 가장 몰입할텐데, 그가 대표하고 있는 소시민의 상황은 대다수의 관객들이 경험했던, 혹은 간접적으로 보고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허준호의 연기는 온몸으로 당시의 상황을 받아내고 있다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빚을 갚지 못해 수감된 동료를 면회하고 온 갑수가 거리를 걷는 장면은 (아마 90년대 느낌이 남아있는 어느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겠지만) 현재의 거리에 97년의 갑수가 당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CG 등으로 배경 전체를 덮어 씌우는 대신 현재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IMF사태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역시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이다. 한시현의 행보는 종종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남초 사회인 재계,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시현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여성 영웅으로써의 한시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는 현실 때문에 한시현이 금융위기를 막는 서사로 나아가진 못하지만, 그와 같은 인물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가올 위기에 맞설 미약하지만 필요한 용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시현을 한국영화 속 여성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의 특별한 인물과의 만남이라던가, “계집애는 어쩔 수 없다”라는 재정부 차관의 성차별적 발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이어가는 장면은 한시현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그가 자신의 팀원들과의 연대적 관계에도 주목해 볼만하며, “여자들은 감정적이어서 안 된다”는 남성 캐릭터의 발언과 대비되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감정적인 남성들과 이성적 협상을 우선시하는 한시현의 대비도 적절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유아인의 연기다. 그가 연기한 윤정학은 분석력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캐릭터인데, 그의 캐릭터는 최대한 이성을 붙잡으려는 한시현 캐릭터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굉장히 감정적인 이 캐릭터는 종종 과잉의 순간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아인이 연기하는 과잉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베테랑>의 조태오 이후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들에서 조태오스러움을 반복적으로 발견하고 있다. 과잉된 연기가 그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캐릭터로 남은 것 같은 인상이다. 때문에 차분하게 쇼트를 쌓아가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홀로 감정과잉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선보이는 유아인의 연기는 완벽한 에러다. 김혜수와 허준호를 비롯해 조우진, 류덕환, 권해효, 박진주, 그리고 뱅상 카셀 등의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영화의 톤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다르게 유아인은 홀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러한 괴리감이 에필로그에서의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연기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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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공조>를 통해 예상외의 흥행성적을 거둔 김성훈 감독이 현빈과 함께 새로운 작품을 촬영했다. <창궐>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을 배경으로, 조선에 야귀(좀비)떼가 창궐한다는 소재를 담고 있다. 영화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따르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따라간다. 왕(김의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음모를 꾸미던 김자준(장동건)이 야귀떼를 통해 계획을 실현하고, 때마침 청나라에서 돌아온 강림대군(현빈)이 이를 저지하려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다. 때문에 <창궐>은 독특한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익숙한 이야기만을 답습하며 마무리될 뿐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배경 충무로 사극들의 관습이야 말로 야귀떼보다 무서운 고질병이 아닐까 싶다.



 매해 여러 편의 조선시대 배경 사극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자본이 들어간 영화들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대역배우를 데려다 왕을 연기하도록 시키던, 관상을 보거나 풍수지리를 끌어오던, 전쟁을 치르던, 괴물이나 야귀떼가 궁궐까지 쳐들어오던 모든 이야기는 왕권 다툼을 그려내는 것에 그치고 만다. 아무리 참신한 소재를 들고 와도 조선, 특히 한양 도성이라는 배경 안에서 모든 이야기는 왕권 다툼으로 귀결된다. 때문에 어떤 영화를 봐도, 어떤 소재를 봐도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창궐>은 바로 한 달 전에 개봉한 <물괴>와 거의 동일한 시대, 유사한 소재, 궁궐이라는 배경을 공유한다. 때문에 두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동일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거의 모든 소재를 왕권 다툼을 통한 사회비판에의 비유에 소비해버리는데, 때문에 장르적 쾌감은 대부분 희석되어버리고 지겨움 만이 남게 된다. <창궐>의 경우 <물괴>보다 영화적 완성도는 나은 편이나, <부산행>과 별반 다르지 않은 좀비들의 움직임과 디자인, 영화 스스로도 하질(저질)이라 평하는 유머 코드, 불필요한 플래시백으로 점철된 한국 상업영화 특유의 편집까지 대부분의 면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또한 이러한 영화들이 참된 왕의 상을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아마도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후 퍼진 경향으로 생각되는데, <대립군>, <물괴>, <명당> 등 최근 개봉한 조선시대 배경 사극들 또한 이러한 경향을 공유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저 추상적인 리더상을 그려낼 뿐이지만, <창궐>은 꽤나 직접적으로 현재의 정권을 연상시킨다. 영화 거의 마지막 장면, 궁궐의 야귀떼를 물리치고 김자준을 해치운 강림대군은 근정전 지붕 위에 앉아 횃불을 들고 몰려온 민초들을 바라본다. 이 모습은 마치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를 광화문 위 혹은 청와대에서 바라본 구도를 연상시킨다. 이 장면에서 강림대군은 “늦어서 미안하네”(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이러한 내용의 대사)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명백히 왕권 국가인 조선을 배경으로 현재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올바른 리더의 모습을 치켜세우는 것은 일종의 우상화일 뿐이다. <물괴>는 적폐 정권을 갈아치우기 위해 벌어졌던 촛불집회가 마치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벌어진 것처럼 그려낸다. 늦게 왔다는 강림대군의 대사는 이미 왕이 될 사람이 결국 왕이 되었고, 이를 당연하게 촛불집회의 이미지와 연관시킬 수밖에 없는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대통령을 떠올린다. 어설픈 프로파간다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때문에 <창궐>이라는 영화의 정치적 태도는 유사한 이야기를 지닌 다른 영화들보다도 구차하게 느껴진다. 


p.s. 영화의 엔드크레딧에 작년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이름이 특별출연으로 올라온다. 김주혁은 강림대군의 형인 세자 역할을 맡았으나, 촬영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 역할은 김태우가 다시 촬영하여 영화가 완성되었다. 비록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창궐>은 김주혁 배우의 정말 마지막 작품이 되는 셈이다.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한반도와 그 인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변호인>으로 천만의 맛을 봤던 양우석 감독의 신작 <강철비>는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2011년 양우석 감독은 북한의 쿠데타와 핵전쟁 위기를 담은 웹툰 『스틸레인』의 스토리를 쓴 경험이 있다. <강철비>와 『스틸레인』의 주인공과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스틸레인』을쓸 때 쌓은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강철비>가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은 지금의 한국, 이제 막 남한의 대선이 끝난 시점이다. 북한의 은퇴한 군인 엄철우(정우성)는 군부의 리태한(김갑수)에게서곧 쿠데타가 벌어질 것이라며 그의 원인이 되는 인물들을 암살할 것을 명령받는다. 엄철우는 명령을 받고 개성으로 향하지만, 개성에 도착한 것은 북한의 1호. 거기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개성은 미사일 공격을 받게 되고, 엄철우는 얼떨결에 북한 1호를 데리고 남한으로 피신한다. 엄철우가북한 1호를 치료하기 위해 찾은 병원이 우연히도 청와대 외교수석인 곽철우(곽도원)의 전 부인이 운영하던 곳이었고, 남한 측에서 북한 1호를 보호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쿠데타가 벌어진 북한은 남한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참에 핵으로 전쟁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통령 이의성(김의성)과 통일을 생각하면 핵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의견인 당선인 김경영(이경영)이 대립한다.



 <강철비>는 딱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담아낸 영화이다. 기존의 영화들이 남한과 북한에 인물, 여기에 미국 혹은 중국의 인물들을 짧게 끼워 넣었다면, <강철비>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입장까지 담아낸다. 청와대 외교수석인 곽철우가 CIA나 중국 외교부 등과 정보를 교환하며 정세를 파악하고, 한반도 위에서 핵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 또한 꼼꼼하고 납득 가능하게 묘사된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벌어지고, 북한 1호가 의식불명 상태로 남한에 내려오게 된다는 과감한 상황을 기대보다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는 것이 <강철비>와『스틸레인』, 양우석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때문에 <강철비>를 보는 것은 언뜻 어떤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한반도 정세와 역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음모론을 실제 역사와도 같은 꼼꼼함으로 풀어낸 김진명 작가의 소설과 같다. 북핵 문제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은『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나비야 청산가자』, 제목 그대로 사드 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THAD』와 같은 소설과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김진명의 소설처럼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등이 북한 1호의 상태와 쿠데타, 북핵 등의 정보를 두고 벌이는 논쟁들과 대선이라는 이벤트와 맞물리는 남한의 핵무장에 관한 의견 차이, 분단과 핵전쟁위기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까지 나름 생생하게 묘사한다. 여기에 <변호인>에서 드러났던 양우석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 블록버스터 다운 액션(엄철우와 북한 암살요원 최명록(조우진)의 몇몇 액션은 <존 윅> 같은 근접 총기 액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퀄리티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으로 양념을 한 작품이 바로 <강철비>이다.



 때문에 <강철비>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낡고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철비>는 분명 한국전쟁부터 현재 시점의 이르는 남북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세세하고 현실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렇기에, 전쟁 불감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관객들에겐 또 하나의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제작의 시기상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기도 하지만, 탄핵정국(영화가 겨울의 대선에서 시작하는 것은 분명 올해 12월 이었었어야 할 대선을 노린 것이다)과 트럼프의 미국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아쉬운 점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현재의 사드 문제까지 이어지는, 북핵을 놓고 오랜 기간 이어지는 대립의 역사는 다소 지겹게 느껴진다. 여기에 휴머니즘을 녹여내기 위해 집어넣은 몇몇 장면들, 가령 함께 수갑을 차고 국수를 먹는 두 철우라던가아재개그를 치는 장면, 지드래곤의 노래를 기어이 두 번이나 삽입하는 것 등의 장면들은 140분의 긴 러닝타임을 더욱 늘어지게 만든다. 또한 전반부 북한의 쿠데타 과정에서 등장하는 교차편집이 큰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도 아쉽다. <변호인>의 법정 장면이 송강호라는 괴력의 배우의 능력에 힘입어 긴장감과 감동을 자아냈다면, <강철비>의 장면들은 그 정도의 괴력을 지닌 배우가 없고 편집만으로 이를 만들어내기엔 아직 감독의 역량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쿠데타와 핵전쟁, 남한으로 피신한 북한 1호 등의 상상은 모두의 상상임과 동시에 지겨워진 상상이다.



 <강철비>는 남한의 핵무장이라는 이슈에 대해 놀랍도록 중립을 유지한다. 대통령과 당선인 두 캐릭터는 각각 핵무장 찬성과 반대로, 전시상황에서의 핵공격 찬성과 반대로 갈라서서 대립한다.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보다 분단을 이용하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곽철우의 대사처럼, <강철비>는 전쟁과 핵을 정치와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이다. 영화는 140분 러닝타임 내내 그 중립을 유지하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선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한국 상업영화의 고질병과도 같은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지만 들어가는 에필로그’를 넣기 위한 선택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입장중 어느 한쪽으로 수렴하는 결말을 맞게 된 엔딩을 통해 영화와 양우석 감독은 한쪽에 입장에 가까이 서게 된다. 때문에 <강철비> 또한 분단의 상황 사이에서 태어난, 155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낸 상품으로만 느껴진다. 상업영화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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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은 어느 관객의 “좆같네 씨발”이었다. 감독 교체에 1년 이상 개봉이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개봉한 영화 <리얼>을 영화로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다. 바로 한 주 전에 개봉한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영화라는 매체를 추락시키기 위한 영화였다면, <리얼>은 영화라는 매체 밖에 놓여야 하지 않을까? 115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때깔 좋은 이미지들이(그나마 <트랜스포머>처럼 눈이 아프고 어지럽지는 않았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지만 영화적으로는 단 한 톨만큼의 필요성도 없고, 줄거리를 설명하는 행위는 <리얼>을 어떻게든 서사를 가진 창작물의 범주로 끼워 맞춰보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해리성 인격장애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감독은 포털 사이트에‘해리성 인격장애’라는 7글자를 검색하기 귀찮았던 것 같다. 소재에 대한 몰지각함과 재능의 부재는 끔찍하게도 의미 없는 137분의 디지털 데이터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주연을 맡은 김수현을 비롯해 성동일, 이성민, 최진리 등의 배우들은 낭비되는 수준을 넘어서 능력을 부정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카메오들은 그 존재가 삭제당한 것처럼 사라졌다. 끔찍하게 대상화된 <리얼> 속 수많은 여성들은 얼굴보다 다리와 엉덩이, 가슴과 허리가 더 많이 등장한다.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된 <리얼>은 시작-중간-결말의 3막 구조의 틀을 깨부수려는 듯 제멋대로 흘러간다. 아니, 의도적으로 깨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3막 구조에 맞춰서 플롯을 짜 놓았지만 감독을 비롯한 모두의 재량 부족으로 서사 자체가 없는 137분이 되어버린다. 액션 누아르를 표방했음에도 중고등학생의 극저예산 영화에나 나올법한 합의 액션이 등장한다. 후반부 피날레를 장식하는 슈퍼파워 액션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서 주란이 각성하는 순간보다 더 황당하고, 각성하는 순간의 묘사는 차라리 <디지몬 어드벤처>의 진화 장면처럼 그려진다. 발레 무용수가 만들었다는 마지막 발레 액션은 끔찍하기 짝이 없으며 아무런 맥락도 의미도 의도도 찾아볼 수 없다. 차라리 뮤직비디오 라면 이해가 됐을까? 봉준호 감독은 <옥자>를 국내에서 제작하면 500억 원의 제작비만큼 다른 한국영화들이 멈추기 때문에 해외자본을 투자받았다고 인터뷰했다. CJ CGV는 <옥자>가 극장 생태계를 파괴한다며 상영을 거부하고, <옥자>의 개봉일에 <리얼>을 개봉시켰다. 그러한 양보의 결과물 중 하나가 <리얼>이라면, 한국상업영화는 영화이기를 포기했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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