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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검은 사제들>은 한국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장르영화였다. 가뜩이나 상업영화계에서 호러 장르를 등한시하던 와중에, 본격적으로 (무당이 아닌)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관객들이 호평을 보냈다. 더욱이 강동원과 박소담 등의 적절한 캐스팅, 한국의 상황에 알맞게 이식한 엑소시즘 장르의 클리셰 등은 장재현 감독이 장르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데뷔작이자 <검은 사제들>의 초석이 된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부터 각본으로 참여한 <장산범>까지의 짧은 필모그래피에서 그의 영화적 자양분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4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영화 <사바하>는 기독교 목사를 주인공으로 불교적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전작처럼 오컬트 장르의 요소들을 사용하지만, 오컬트를 차용한 종교 스릴러라고 보는 게 더욱 알맞을 것 같다. 영화는 금화(이재인)가 자신의 괴상한 쌍둥이 언니와 함께 태어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이비 종교 집단들을 조사하는 박웅재 목사(이정재)는 조수인 고요셉 전도사(이다윗), 고등학교 후배인 해안스님(진선규)의 도움을 받아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단체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한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인 정나한(박정민)이 나타나고, 박웅재의 조사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전작 <검은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사바하> 또한 오컬트/종교 소재 호러 영화의 클리셰를 따라간다. 악령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가 등장하고,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지고, 염소 등의 동물 클로즈업이 등장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번 영화는 무당, 목사, 스님 등이 등장하여 무속신앙, 불교, 기독교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박웅재가 기독교 목사이긴 하지만, 다양한 종교의 특성을 파악하고 각종 사이비 종교를 조사하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것이다. 때문에 <사바하>는 이야기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기존의 종교 소재 호러 영화와는 색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더군다나 지옥이나 악마를 묘사하는 불교 탱화들의 그로테스크함은 호러의 재료로써 꽤나 효과적이다. 천주교 위주의 엑소시즘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불교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신선함도 있다. 또한 구마의식 또는 악령(악마)과의 대결이 중심이 되는 다른 오컬트 영화와는 달리, 탐사 스릴러의 형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불교적이라고 느껴지는 음악과 기독교 찬송가 스타일의 음악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는 등의 양념도 꽤나 만족스럽다. 때문에 <사바하>는 일단, 장르 영화로써 자신이 보여주어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데 충실하다.



 영화의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 측면에서 드러난다. <검은 사제들>은 악령이 씐 고등학생 영신(박소담)과 그를 구원하려는 최 부제(강동원)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부채의식을 담아내는 작품이었다. <사바하> 또한 종교 소재의 호러를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다만 <검은 사제들>과는 다른, 진실과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2014년이라는 배경, 사이비 종교 집단, (고등학생은 아니지만) 무더기로 희생된 특정 학년으로 지칭되는 나이대의 청소년, 생사가 불분명한 배후의 인물 등은 구원파와 유벙언 등의 키워드들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영화 내부에서도 언급되듯이,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추적 60분]과 유사한 흐름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등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서부터 전작과 차이가 난다.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의 시간에서 통용될 수 있느냐는 점에 있다. 여전히 참사의 원인, 구원파라는 집단 등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한 계파를 표방한 구원파의 이야기를 신생 불교 집단의 이야기로 변경하고 이를 파헤치는 인물을 기독교 목사로 설정한 지점, 영화 속에서 스스로 지적하고 있음에도 사건을 선정적으로 그려낸다는 것 등은 도리어 소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특히 극 중 사건의 배후로 등장하는 김제석(정동환)의 실체가 그의 제자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수(유지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세월호에 대한 진실과 믿음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태도가 의심스러워진다. 결국 내부의 행동대장이었던 정나한에 의해 파멸을 맞는 교주, 영화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지점들과 충돌하는 김제석과 금화 사이의 영적 연결 같은 지점들은 세월호라는 알레고리를 읽어내게 된다면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결국 이러한 지점들은 여전히 사건에 대한 논란들이 명명백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연하게도) 감독 스스로도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사건을 잊을 수 없는 관객들은 <사바하>가 다루는, 여전히 흐릿하지만 너무나도 명확한 것처럼 그려내는 지점들 때문에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재중동포 출신으로 <두만강> 등의 작품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내면서, <경주>, <춘몽> 등에 작품을 통해 한국의 지역색을 영화에 담아온 장률 감독이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내놓았다. 이번 작품은 제목처럼 군산에서 촬영된 작품이다. 송현(문소리)이 남편과 이혼하자 윤영(박해일)은 그에게 갑작스러운 군산 여행을 제안하고, 둘은 군산에 도착한다. 둘은 어느 민박집에 묵게 되고 송현은 그곳의 사장(정진영)에 대해, 윤영은 사장의 딸인 주은(박소담)에게 묘한 호기심을 품게 된다.



 영화는 크게 군산을 담은 1부와 윤영이 사는 연희동과 신촌을 담은 2부로 크게 나뉜다. 영화의 제목이 뜨는 시점을 기준으로 나뉘는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우로보로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시간선을 그린다.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앞선 시간대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예전에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나요?”라며 묻는 윤영의 대사는 뒤섞인 시간을 그대로 뒤섞이게 방치한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은 결국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교차점이기에 굳이 시간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윤영과 송현이 군산에 갔을 때 묵는 민박 사장은 재일교포이다. 자폐증이 있는 그의 딸 주은은 일본어로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군산에는 여전히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고, 그들이 묵은 민박도 그러한 주택이다. 그곳은 사각형으로 순환하는 듯한 닫힌 구조를 지닌 공간이다. 인물들은 그 사이를 계속해서 돌아다닌다. 백현진이 연기한 조선족 인권운동가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울부짖지만, 그는 조선족의 말투를 모방하는 조선족이 아닌 사람이다. 그는 역사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용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가 역사가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 존재하기에 저러한 언행이 가능한 것일 것이다. 장률은 군산과 신촌을 배경으로 한중일의 역사가 교차하는 공간과 인물들 배열한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지닌 시간 구조는 교차와 순환을 만들어내며 인물들의 행동과 역사를 살포시 겹쳐 놓는다.



 결국 장률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도달하는 지점은 그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간의 순환, 교차성, 역사, 재중동포라는 정체성 등이 어지럽게 겹치고, 그 위에 인물들이 다시 한번 겹치면서 장률의 작품이 탄생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윤영은 자신의 서울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아주머니(김희정)의 큰할아버지가 자신이 흠모하는 시인 윤동주의 사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률은 흐트러진 시간의 순환선 안에 우연들을 툭 하니 던져 놓는다. 역사, 지역, 민족 정체성은 결국 우연의 총체일 뿐임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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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홍상수의 21번째 장편영화인 <그 후> 보다 늦게 20번째 장편영화가 국내에 도착했다. 오늘(4월 18)일 언론시사회 및 영화비평독립잡지 필로(FILO)의 창간 기념 상영회를 통해 국내에 첫 상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2011년 <다른나라에서> 이후 이자벨 위페르가 다시 한번 홍상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재회가 가능했던 것은 영화가 2016년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칸을 배경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상수와 22번째 작품인 <풀잎들>까지 내리 5작품을 함께하는 중인 김민희는 <아가씨>로, 이자벨 위페르는 폴 버호벤의 <엘르>로 각각 칸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직접 칸 국제영화제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영화 내내 영화제가 언급되고 칸을 찾은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이 등장하기에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영화가 칸 영화제 기간의 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익숙한 홍상수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영화제 기간 동안의 업무를 위해 칸을 찾은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는 갑작스레 상사인 양혜(장미희)에게 해고당한다. 양혜는 만희가 부정직하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얼떨결에 일도 없이 칸에 남게 된 만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만희가 만나게 된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풍경과 사람들을 찍고 다닌다. 한편 양혜는 영화제에 초청된 완수(정진영)와 함께 영화제 일정을 준비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양혜와 완수는 애정관계에 있으며, 완수가 술에 취해 만희와 보낸 하룻밤에 의해 해고된 것임이 밝혀진다. 술과 술자리, 애정문제, 외도 등 익숙한 소재들이 69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이어진다.



 칸에서 <클레어의 카메라>가 촬영되는 동안 국내에서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외도 루머가 등장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김민희와의 협업 이후 그의 외모를 한 여성 캐릭터가 홍상수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찌질한 남성 캐릭터들을 찍어 누르는 분열적인 작품이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선 애정에서 비롯된 존중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후>는 의외로 장르적인 문법을 (약간) 차용하여 삶과 사랑을 예찬하는 영화였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과한 홍상수의 가장 반박적인 영화인 것으로 느껴진다. 만희와 완수, 기시감이 느껴지는 두 캐릭터의 이름과 영화의 첫 쇼트에서 목격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포스터는 <클레어의 카메라>가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강하게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칸을 찾은 세 한국인(만희, 양혜, 완수)의 곁을 맴돌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아낸다.



 만희는 클레어에게 “당신은 왜 사진을 찍나요?”라고 묻는다. 클레어는 “왜냐하면 세상 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만사를 다시 매우 천천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한다. 관객은 클레어를 따라 세 명의 인물을 바라본다. 클레어는 또한 “사진을 찍힌 사람은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돼요.”라고 말한다. 촬영과 동시에 사진을 인화해내는 클레어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재빠르게 카메라에 담긴 이와 카메라 밖의 존재를 분리한다. 사진에 담긴 이와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찍힌 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클레어는 이에 의문을 가진 완수와 양혜에게 천천히 자신의 눈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느낌이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완수는 이를 통해 카메라에 찍히기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을 분리해낸다. <클레어의 카메라>의 서사 속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관객은 클레어의 눈을 응시하는 완수처럼 스크린을 응시하며 뒤틀린 시간을 맞춰보려 한다. 만희가 해고당한 당일,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시점, 그리고 그다음 날.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극 중 시간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옥상 위 만희의 시간은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 위선으로 가득한 완수와 양혜가 짜 맞추려는 만희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돌출되어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즉각적으로 분리되는 개인이라는 감각과 연결된다. 영화는 이러한 개인을 천천히 응시하기를 바란다.



 홍상수는 반복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한다. 홍상수라는 개인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클레어의 카메라>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스캔들 이후 음모론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물어뜯기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 그가 한국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촬영한 세번째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홍상수라는 개인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촬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의 최근 필모그래피 (특히 김민희를 만난 이후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애매한 작품이라 느껴지지만, 동시에 여전한 그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인 <클레어의 카메라>는 에릭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6부작의 <클레어의 무릎>을 연상시킨다. 무척이나 성애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클레어의 무릎>이 지닌 육감적인 감상과 <클레어의 카메라> 속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이성은 사뭇 대조적이다. 홍상수가 카메라라는 장치를 꺼내 든 것은 영화가 그려내는 개인과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가 담아낸 위선을 응시하길 바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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