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영화'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미지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이것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며 며칠 만에 사망한다. <잇 컴스 앳 나잇>은 바이러스가 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폴(조엘 에저튼)과 아내인 사라(카르멘 에조고), 아들인 트래비스(캘빈 해리슨 주니어)가 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있다. 바이러스 증상이 드러난 그를 죽이고 불태운 뒤 땅에 묻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물과 식량을 아껴가며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 갑자기 문을 두드린다. 가족을 위해 물과 식량을 찾던 윌(크리스토퍼 애봇)이 폴의 집을 빈 집으로 착각해 침입하려 한 것. 폴은 윌을 잡아 두고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가족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윌에게 어느 정도의 식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폴은 윌의 가족과 집을 공유하기로 하고, 그의 아내인 킴(라일리 코프)과 어린 아들이 폴의 집에 도착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존해간다. 그러던 중 숲 속으로 달려가 버렸던 트래비스의 개 스탠리가 야밤 중에 돌아오고, 그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잇 컴스 앳 나잇>은 표면적으로는 바이러스라는 재난의 상황과 그 안에 놓인 인간들 사이의 심리를 그린 재난 공포 영화로 보인다. 폴이 장인어른을 쏴 죽이는 오프닝 시퀀스와 밤중에 윌이 집으로 침입을 시도하는 장면 등은 전형적인 장르적 공포 효과를 선보인다. 트래비스의 꿈을 통해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고 불안감의 분위기를 깔아 두는 방식 또한 평범하지만 효과적이다. <잇 컴스 앳 나잇>이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는 것은 윌의 가족이 폴의 집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두 가족이 한 집에서 일상을 만들어가고 교류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화목해 보인다. 윌과 킴은 오랜만에 목욕을 즐기고, 트래비스는 윌에게 장작 패는 법을 배우고, 사라는 킴에게 집을 정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함께 밥을 먹고 사냥과 채집에 나서며, 이런저런 집안일을 함께 해나가며 작은 농담을 주고받는 몽타주는 아름답도록 행복해 보인다. 윌의 가족이 어떤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하며 그들의 방을 몰래 들여다보던 트래비스는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웃는다. 호러 장르에서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몽타주는 어렵사리 쌓아 올려진 화목함을 담아낸다.



 이러한 화목함, 행복은 폴의 가족과 윌의 가족이 서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아 두어야 가능하다.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폴은 끊임없이 트래비스에게, 사라에게 우리 가족 이외의 사람들을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엔 폴과 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의심이 드러난다. 앞서 등장한 아름다운 몽타주는 가식으로 의심을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화목함이다. 트래비스의 악몽으로 제시되는 불길함은 그들의 가식 밑에 지울 수 없는 의심이 깔려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스탠리의 귀환과 함께 표면 위로 떠오르는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은 최소한의 가식마저 차릴 수 없게 인물들을 몰아간다. 그들에게 표면적인 선의를 베풀 여유가 사라진다. 영화 내내 뿌려진 사람들의 의심이라는 씨앗 표피를 뚫고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표면적인 가식으로 서로에 대한 의심을 감출 최소한의 여유도 없을 때의 사건이다.



 <잇 컴스 앳 나잇>이 담아내는 파국은 어딘가 현실을 닮았다. 최소한의 여유를 가졌을 때 드러나는 아름다운 화목함과 여유를 잃어버렸을 때의 파국은 현실에서 범람하는 혐오범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삶에서 여유가 제거될수록 상대방이 나의 안정을 박살내고야 말 것이라는 의심과 불안함은 커져만 간다. 인종적, 젠더적 요소가 갈등의 요소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폴의 가족과 윌의 가족 두 집단이 충돌하는 이야기는 도리어 현실의 혐오범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잇 컴스앳 나잇>이 담아내는 공포는 어떤 질병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이 아니다. 비록 그 표면이 가식일지라도, 그 속에 심어진 의심을 가리는 가식을 가질 여유도 잃어버린 사람들의 충돌에서 오는 공포의 상상력을 장르적 상상력과 결합한 작품이다. 때문에 <잇 컴스 앳 나잇>이 담아내는 공포는 굉장히 깊게, 시의성 있게 다가온다.

 ‘Mayhem’ 대혼란, 아수라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이다. 조 린치 감독의 B급 영화 <메이헴>은 제목 그대로의 아수라장을 담아낸다. 영화는 변호사인 데릭 조(스티븐 연)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사람들의 분노, 성욕, 우울 등의 본능을 극대화시키는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한 회사원이 직장 상사를 펜으로 찔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데릭 조는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이 아닌 바이러스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으로 상사를 살해한 회사원은 무죄라는 판결을 이끌어내며 고속 승진하는 탄탄대로에 올라탄다. 가족과 통화할 시간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기 위해 살아가던 데릭은 회사의 잘못으로 터진 사건을 막기 위해 갑작스레 해고당한다. 그리고 데릭이 해고당하던 날 회사 건물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바이러스가 정화되기 위해 필요한 8시간 동안 건물이 봉쇄된다. 이미 회사 건물에 퍼진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감염되고, 건물은 아수라장이 된다.



 사실 공개된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고선 좀비 영화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메이헴>이 좀비 영화인 줄 알고 상영관을 찾았을 것이다. 심지어 스티븐 연은 <워킹데드>의 글렌이니까! 때문에 해고당한 데렉이 좀비가 된 직장 상사들을 마음껏 썰고 패면서 건물을 빠져나오는 작품이 아닐까 지레짐작했었다. 직접 관람한 영화는 생각한 것과는 정 반대의 영화였다. <메이헴>은 좀비를 피해 건물을 탈출하는 이야기가 아닌,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신을 해고한 직장상사들을 죽이러 건물 지하에서부터 최상층까지 치고 올라가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회사는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데릭을 희생자로 내세우지만, 데릭은 자신이 승진할 수 있는 이유였던 (동시에 회사가 성장하는 계기였던) 바이러스 무죄 판결을 이용해 자신을 내친 회사를 자신의 두 손으로 박살 낸다. 좀비처럼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단지 본능적인 분노가 극대화되는 바이러스라는 설정은 데릭이 마음껏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건물의 지하에서 망치, 몽키스패너, 네일건 등을 잔뜩 챙겨서 마치 게임 속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듯 한 층 한 층 올라 기어코 자신의 보스를 죽이고 마는 <메이헴>의 이야기는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모든 회사원이 통쾌해 할 만한 쾌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좋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 역시 존재한다. 데릭의 내레이션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 등을 전달하는 초반부는 조금 늘어지고, 86분의 러닝타임의 절반에 가까운 40분 정도를 그저 설정을 깔아 두는데 할애한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몇몇 장면에서의 튀는 편집, 가령 데릭은 아직 어떤 정보를 접하지 못했을 타이밍인데 이미 상황을 다파악하고 있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거슬린다. 통쾌한 폭력의 향연이 이어지지만, 젠더적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캐릭터들은 조금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농담으로 소비하는 장면이 있다는 점에서, 젠더적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농담을 집어넣었다는 점은 아쉽다. 물론 영화가 담는 미소지니가 이러한 장르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수준에 머물기는 한다. 전체적으로 조 린치 감독의 연출력 부족으로 인한 캐릭터의 깊이 부족, 인서트가 숏이 부족한 편집,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에만 치중한 촬영과 편집 등은 <메이헴>의 설정과 이야기가 지닌 통쾌함을 반감시킨다.



 그럼에도 <메이헴>은 통쾌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장르영화 작품 중 가장 관객 반응이 좋았던 작품을 꼽자면 <메이헴>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회사의 최상층에 도달하려는 데릭의 여정은 국적을 넘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회사생활의 스트레스, 회사 속에서의 정치와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모두를 뒤엎는 쾌감을 제공한다. <워킹데드>의 글렌이 스트레스의 시달리는 회사원이 된 것만 같은 모습의 스티븐 연은 이번 영화의 쾌감을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 된다. 스티븐 연의 팬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될 연기와 매력이 담겨있다. 그와 함께 팀을 이루는 멜라니를 연기한 사마라 위빙의 매력 또한 <메이헴>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