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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다 마모루의 신작 <미래의 미라이>는 <디지몬 어드벤처>부터 <늑대아이>, <썸머워즈>, <괴물의 아이> 등 최근작까지 우정, 모성애, 가족애, 부성애 등을 다뤘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이다. 4살 소년 쿤(카미시라이시 모카)은 엄마(아소 쿠미코)와 아빠(호시노 겐)의 관심이 새로 태어난 여동생 미라이에게 쏠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던 중 쿤은 (의인화된) 반려견 윳코(요시하라 미츠오), 미래에서 온 여동생 미라이(쿠로키 하루), 어린 시절의 엄마(사이카 사쿠라), 젊은 시절의 증조할아버지(후쿠야마 마사하루) 등을 만나는 환상적인 모험 속에서 성장하고, 가족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쿤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넘나드는 여행을 에피소드의 병렬적인 나열 형식으로 담아낸다. 각각의 여행을 통해 여동생 미라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소홀해진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며, 증조부모 때부터 이어진 가족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산만하게 전개되고, 종종 튀는 작화를 보여주는 바람에 산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더욱이 남아인 쿤이 가족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남자애가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퉁쳐지는 사건들을 통해 촉발된다는 점은 <미래의 미라이>가 강조하고자 하는 지점들을 흐릿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래의 미라이의 ‘벌 놀이’에 대한 쿤의 반응이나, 2차대전 때 비행기 엔진 공장에서 일했던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장면은 젠더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에서 큰 고민 없이 들어갔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전자는 남아의 성적 판타지를 은근슬쩍 드러낸다는 점에서 불쾌하기만 한 장면이고, 후자는 2차대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과 그 시절을 낭만화한다. 이러한 두 에피소드에 대한 불쾌함을 제외하더라도, 쿤의 단선적인 성장을 위해 도구화되는 가족들의 면면을 나열하는 방식은 호소다 마모루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그 밀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미래의 미라이>는 <괴물의 아이>를 보고서 낮아진 호소다 마모루에 대한 기대치를 확정 지어주는 작품에 그치고 말았다.




*스포일러 포함


 작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러닝타임 310분의 영화를 봤다. 기나긴 러닝타임 때문에 개봉은 못 한 작품이지만, 5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인터미션도 없이 관람하게 한 것은 그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가 가진 힘이다. 그때부터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렸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공개된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은 다행히도 119분의 러닝타임,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몇몇 영화제나 기획전을 통해 소개되었고 내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상상마당 CINE ICON 기획전을 통해 관람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아사코 I&II>는 이상한 영화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3.11 동일본 대지진을 영화 속으로 끌어오고, 멜로드라마의 틀을 통해 재난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오사카에서 살아가던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전시를 관람하다 우연히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라는 남자를 만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둘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쿠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2년 뒤, 도쿄로 거쳐를 옮긴 아사코는 우연히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1인 2역)를 만난다. 너무나도 닮은 모습에 화들짝 놀라지만, 계속해서 마주치면서 아사코는 료헤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사코와 료헤이,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사라졌던 바쿠가 다시 나타난다.


 

 <아사코 I&II>는 이상하다. 이 영화를 모노가미적 이성애 규범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오독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 영화를 통해 붕괴시키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주저하다가, 3.11 동일본대지진이 있던 날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사라졌던 바쿠는 광고모델이 되어 도시 한복판의 광고판을 통해 재등장한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바쿠가 나타나 손을 내밀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떠난다. 하지만 아사코는 결국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오고, 료헤이와 아사코는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지만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아사코와 료헤이의 (재)결합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신뢰함으로써 성립되는 기묘한 관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기묘한 관계를 포스트-재난 시대의 새로운 태도로 제시한다. 이 태도는 포스트 뒤에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말들을 붙여도 어느 정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의 세계, 문명이라는 조건이 이제 자연화 되어버린 시대에 지진과 같은 재해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차별 살인/폭행’ 뉴스 또한 통제 불가능한 무엇인가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뢰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며 붕괴된다. 지금의 세계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광고하며 통제할 수 없는 외부를 은폐한다. 결국 <아사코 I&II>가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에 불신은 이 세계의 필요충분조건이며, 그 조건 하에서 사랑이라는 것 또한 불신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안에서 3.11를 통해 제시되는 재난 이후 파괴된 신뢰는 복구될 수 없다. 외부에서 무엇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세상인데,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믿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복구될 수 없는 신뢰를 계속 끌어 앉고 사느니, 불신을 믿음으로써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역설적인 설정은 포스트-재난의 세계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사코와 료헤이는 새로운 집에서 같은 강을 바라보며 “아름답다”와 “더럽다”는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여준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둘, 그 사이에는 신뢰가 붕괴되어 단절된 둘 사이의 거리감과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재가 존재한다. 사실 이러한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올해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의 엔딩에서, 나루미는 외계인에게 몸을 빼앗긴 남편 신지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신지가 그 개념을 가져가자 침략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루미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은 남아있지 않다. 영화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나루미와 신지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숏-리버스 숏 구도를 보여주며 끝난다. 기요시 또한 <산책하는 침략자>를 통해 3.11 이후를 이야기하며, 그 이후의 사랑이란 분열되며 절대 쌍방일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재난 이후에도, 쌍방향의 신뢰가 사라진 이후에도 함께하겠다며 다짐하는 이들의 시선이 마주치지 못한 채 끝나는 두 영화는 포스트-재난 시대를 맞이한 현재를 그려낸다.

전후에 제작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속 가족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정상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동경 이야기>의 가족은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던 서먹한 관계이며 주인공은 남편을 잃은 며느리 노리코이다. <초여름>의 주인공 노리코는 가족이 맺어준 혼사를 거부하고 오빠의 친구이자 홀아비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며 전통적인 대가족의 해체를 그려낸다. 그가 전쟁 이후 만들어낸 세 번째 작품인 <만춘>은 이러한 오즈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의 틀을 잡아준 첫 작품이다. <만춘>의 노리코(하라 세츠코, 앞서 언급한 두 노리코와 같은 배우)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소미야(류 치슈)와 함께 살고 있다. 소미야는 자신이 더 나이 들기 전에 노리코를 혼인보내려 한다. 하지만 노리코는 나이 든 아버지를 홀로 두고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소미야는 노리코의 고모와 함께 선을 주선하기도 하고, 자신이 재혼하는 것처럼 꾸며 노리코를 안심시키려 하기도 한다. 노리코는 결국 결혼을 결심하고, 노리코와 소미야는 결혼 전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언뜻 보기에 전쟁과 서구화 등을 거치며 파편화된 정상가족이 서로 간의 신의와 우애를 다지는 결말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이러한 징후들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노리코가 자전거를 타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코카콜라 광고판이나 영문으로 적힌 카페의 간판 등은 전후 일본에 미군이 상주하면서 급격하게 진행되는 서구화의 단면이다. 영화는 또한 전쟁의 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 (<동경 이야기>의 경우 이를 언급하는 언행을 꺼려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전쟁 이후 재건된 일본을 담아낸다. 전쟁의 여파는 주로 부재하는 가족을 통해 드러난다. 결국 오즈 영화의 가족은 서구화(핵가족화)되고, 전쟁으로 인해 구성원이 부재하게 되면서 파편화된다. 이러한 가족들은 영화 내내 이해를 통한 봉합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동경 이야기>의 주인공 부부는 동경으로 올라온 부모님을 귀찮아하지만, 며느리인 노리코만이 그들을 챙기며 시부모-며느리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자리 잡으려 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초여름> 역시 전통적인 대가족의 결혼 서사를 거부하던 노리코가 가족과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만춘>은 노리코를 떠나보내려는 소미야와 소미야를 떠나지 않으려는 노리코가 끝내 각자의 감정을 털어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이해의 결과물은 결국 해어짐으로 마무리된다. <동경 이야기>의 노리코는 결국 새 출발을 독려받으며 시부모를 떠나고, <만춘>의 노리코는 소미야를 떠나 결혼하게 된다. 영화의 끝에 홀로 남는 것은 결국 아버지(심지어 세 영화 모두 같은 배우인 류 치슈이다)이다. 때문에 오즈의 영화는 언뜻 보기엔 따뜻한 가족 드라마로 느껴지지만, 영화의 말미에 남는 감정은 차가운 고독함이다.



 카메라를 다다미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인물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다다미 쇼트와, 인물의 얼굴 정면을 바라보는 대화 장면의 쇼트-리버스 쇼트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와 차가운 고독함 사이에 존재하는 오즈 영화의 양가적인 측면을 대표하는 그의 영화 양식이다. 다다미 쇼트에서 인물들의 눈높이는 스크린을 가로로 3등분 했을 때의 3분의 2 지점 즈음에 위치한다. 풀숏과 바스트 숏 모두에서 같은 눈높이를 유지하는 촬영은 관객이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장면을 보고 듣는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다다미 쇼트는 주로 노리코와 소미야, 소미야와 고모, 고모와 노리코 등 가족관계가 명확한 인물들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정면(물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정면에 가까운 시선을 담아낸다)을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이러한 일상 대화 속에서 노리코는 떠나길 거부하고 소미야는 함께 남기를 거부한다. 노리코가 결혼을 결심한 뒤떠난 여행에서 그는 소미야에게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소미야의 곁에 남고 싶다고 고백한다. 영화 내내 정면에 가까운 대화 속 시선을 담아내던 카메라는 바닥을 향해 고개 숙여 기존 눈높이의 위치(스크린의 3분의 2 지점 즈음)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을 포착한다. 노리코는 소미야의 설득에 다시 고개를 들과 활짝 웃으며 “행복하게 살 거예요”라고 말한다. 노리코가 결혼해 떠나고, 홀로 집에 돌아온 소미야는 사과를 깎는다. 사과껍질이 바닥에 툭 떨어지자 소미야의 고개 역시 노리코의 고개가 파묻힌 지점으로 떨어진다. 카메라는 눈물이나 대사 등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묘사를 거부한 채 바로 쓸쓸하게 파도치는 바다로 넘어간다. 소미야의 고개는 노리코의 고개처럼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오즈의 비정한 카메라는 늙은이가 고개를 떨군 채 홀로 늙어가도록 방치한다. 전쟁으로, 서구화로 파편화된 일본의 가족들은 다시 봉합되지 못한다. 오즈의 양가적인 카메라는 결국 부서지는 파도를 비추며 비정함의 손을 들어준다.

하라 카즈오의 1974년 작품 <극사적 에로스>는 하라 카즈오 본인의 전처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의 전처인 다케다 미유키는 어느 날 하라 카즈오에게 아기를 데리고 오키나와로 떠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고 정말로 떠난다. 아직 미유키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카즈오는 미유키에 대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다. <극사적 에로스>는 그렇게 하라 카즈오가 몇 차례 오키나와를 방문하면서 촬영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이후 하라 카즈오가 만들게 된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극도로 사적인’ 이 다큐멘터리는 다케다 미유키와 하라 카즈오라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여성이 자신의 신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행동,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기존 개념의 해체, 여성과 아이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등을 보여준다.



 다케다 미유키의 행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은 여성의 신체인 자신의 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선택들이다. 그가 도쿄를 떠나 오키나와로 향하는 모습부터, 다양한 성생활을 즐긴 이야기, 그로 인해 파생되는 남성들 간의 관계에서의 주도권, 오키나와에서 만난 여성들 간의 관계, 임신/출산/육아에 있어서도 자신을 포기하는 대신 둘 다를 취하려는 행동 등이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하라 카즈오는 그저 미유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다. 하라 카즈오와 그의 카메라가 망부석처럼 가만히 미유키를 담아낼 수밖에 없었달까? 대신 하라 카즈오는 미유키의 사적인 이야기를 담아내 가장 정치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극사적 에로스>는 다케다 미유키의 극히 사적이고 에로스적인 여정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속에서 배제된 육체들이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낸 정치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미유키의 출산 장면은, 그것이 오로지 미유키 혼자 해낸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놀라우며 영화 속에서 가장 정치적이다.



 영화적 스타일은 <극사적 에로스> 직전의 작품이자 하라 카즈오의 데뷔작인 <굿바이 CP>와 유사하다. 흑백의 화면, 종종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마이크, 인터뷰 장면에서 인물의 입모양과 맞지 않는 보이스 등이 등장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미유키의 출산 장면에서 정점에 달한다. 영상과 따로 놀던 보이스는 더 이상 어긋나지 않고, 동시에 촬영자인 하라 카즈오와 마이크를 쥐고 있는 그의 동료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출산 장면 중간에 하라 카즈오는 내레이션으로 “정작 출산 중인 미유키보다 자신이 더 긴장해 카메라 초점이 나간 줄도 모르고 촬영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카즈오는 중간중간 미유키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 왜에 돌처럼 굳어져 촬영만 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 그러니까 기존의 체제에서 탈출한 여성의 신체가 겪는 극도로 여성적인 상황을 관음증적인 자세가 아닌 자기부정의 자세로 담아내는 하라 카즈오의 태도가 <극사적 에로스>라는 작품이 가능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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