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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두 가족의 하루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자동차 부품 공장의 인사관리팀장 준석(오동민)은 생산라인의 노동자에게 사직을 권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괴로워한다.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는정신질환 약을 먹을 정도로 육아에 시달리고 있고, 은행에 다녀오라는 준석의 닦달에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은행으로 향한다. 은행 앞에 세워둔 차에 아기를 두고 잠시 은행에 다녀오는 사이 차가 견인 당하자 은혜는 망연자실한다. 다른 가족은 준석과 같은 공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반장 현태(장준휘)는 부하직원을 권고사직시키라는 지시에 괴로워한다. 현태의 아내(조시내)는아들(김현빈)을 데리고 병원을 찾고, 아들이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내는 다친 팔목의 깁스를 풀고,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향한다. 아들은 난독증임에도 국어시간에 낭독해야 할 시를 계속 들여다본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가며 대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로카메라를 향한다. 두 가족,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들의 힘겨운 삶은 말 그대로 물속에서 질식해가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영화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시한다. 그들의 삶이 가진 시간차는 준석과 은혜의, 현태와 아내의 전화통화를 통해 좁혀진다. 96분의 러닝타임은 같은 시간을 각 인물의 시각에서 다시 보여주고, 각각의 시간을 모두의 하루로 봉합해가며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단일한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다섯 명의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방식은 그들 각자의 생존법을 보여주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몰아가는 사회적인 혹은 가족 사이의 사건들을 전시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술에 취해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괴로워하던 현태가 객사한 채로 발견되고, 은혜가 자동차에 두고 내린 아기 역시 응급실에 도착하지만 사망한다. 영화는 다섯 인물 각각의 삶과 고난을 전시하고, 그중 몇몇을 택해 그들이 죽은 모습을 담아낸다. 결국 소시민들에게 물속에서 숨 쉬는 법 따위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소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고발하기 위해 각 인물들의 불행을 전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전화통화로만 이어지는 준석과 은혜, 현태와 아내의 소통은 좁혀지는 시간차처럼 무언가 거리를 좁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각자의 고통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고현석 감독은 이러한 편집을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다섯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제각각 보여준다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인 현태에겐 클로즈업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 바스트 숏 이상의 클로즈업이 들어간 장면은 뮤직 펍에서 신청곡도 가능하냐고 묻는 장면 딱 하나뿐이다. 다른 인물들에겐 골고루 클로즈업이 들어갔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촬영은 관객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의 모습은 완전히 타자화된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가 약을 먹는 장면은 제시되지만 극 중 그것이 산후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준석의 윽박지름과 은혜가 저지르는 몇몇 사고만이 등장할 뿐이다. 결국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없이 그들의 고통만 전시하는 영화는, 그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와 짜증만을 남길뿐이다.

*스포일러 포함


 원칙주의자인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명진구청으로 발령 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범령과 조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금세 구청의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나옥분 할머니(나문희)가 나타난다. 그는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리며 수많은 민원을 들고 오는 구청의 유명인사다. 민재는 막무가내로 민원을 들이대는 옥분에게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옥분은 자신이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보게 된다. 자신이 한 평생 품고 살며 꼭 말해야 될 것이 있던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사실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의 소재가 기사로 알려지기 전까지 크게 관심 있던 작품은 아니었다. <스카우트>,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의 재미있는 영화도 연출했지만 <쎄시봉>, <열한시> 등의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김현석 감독의 근작들을 보면서 <아이캔 스피크>라는 작품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를 나문희가 연기하며, 이미 <스카우트>를 통해 우회적으로 5.18이라는 사건을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깊은 감정선을 잃지 않는 연출로 담아냈던 김현석 감독이라는 것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 <아이 캔 스피크>는 기대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 수많은 단점들이 있으며 이를 가릴 생각도 크게 없어 보인다. 족발집 혜정(이상희) 등의 에피소드로 드러나는 시장이 들어선 상가 골목의 재개발 문제, 고등학교 3학년이면서 부모도 없이 민재와 둘이 사는 동생 영재(성유빈)의 이야기,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민재의 모습 등 많은 이야기가 영화의 서브플롯으로 제시되지만 대부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거나 급하게 마무리된다. 또는 영화에서 그냥 증발해버리기도 한다. 우연에만 기대는 몇몇 장면, 가령 구청에서 민재가 옥분에게 소리 지르는 장면을 고등학생인 영재가 (분명 수업시간이라던가 할 텐데) 뜬금없이 나타나이를 목격한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약간 당황스럽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으로 이어가는 아재 개그 역시 통한다면 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유치하고 촌스러운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간다. 구청 양 팀장을 연기한 박철민의 주절거림으로 대표되는 김현식 감독의 코미디 양식이 <아이 캔 스피크>의 코미디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아이 캔 스피크>는대단한 성취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성격이 있고, 생활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으며, 강인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극영화 속 '위안부' 피해자 캐릭터를 만나게 되었다. 때문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는 것은 성격과 개성을 지닌 한 인물로서의 '위안부' 피해자를 극영화에서 만나는 최초의 경험이다. 조금은 지루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반부는 옥분이 한 구, 한 시장 동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는 것을 차근차근 드러낸다. 그동안 <귀향>, <눈길>, <소리굽쇠> 등의 극영화에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자들을 그저 피해자로만 납작하게 담아냈고, <어폴로지>, <그리고 싶은 것> 등의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들 보단 낫지만) 어떤 역할 안에 갇혀있는 인물로 '위안부' 피해자를 담아낸다는 느낌을 없앨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위안부'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그저 역사의 피해자로, 시대에 묶여버린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에 비하면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은 입체적인 성격과 삶을 지닌 개인으로써 존재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생활한다는 자각도 있고, 시장의 다른 여성들과 시스터 후드를 쌓아가며 느슨하지만 끊기지 않는 연대를 이어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사건을 대하는 것에 있어 타인의 설득과 자극을 통해 각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먼저 표출하여 행동한다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보다 압도적으로 앞선 캐릭터이다. 그간의 남성 주인공 실화 바탕 영화들이 남성 간의 연대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이야기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시스터후드가 도드라지는 작품이라는 점도 영화의 유의미한 성취가 아닐까 싶다. 아주 짧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위안소 장면을 <귀향>과 <눈길>처럼 전시적인 태도가 아닌 맥락을 더하는 잠깐의 회상으로만 등장시킨다는 점 또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이를 연기하는 나문희 배우의 연기는 지금까지 실화 속 중요한 인물들을 연기해온 남성 배우들, 가령 <택시운전사>와 <변호인>의 송강호나 <명량>의 최민식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 어쩌면 여성 배우에게는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실화 속 주인공의 위치를 다른 배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기해낸 첫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접해온 나문희의 이미지는 익숙하면서도 가슴 깊이 다가온다.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영화를 보러 갔음에도 그 소재가 드러나는 영화의 2/3 지점에선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분노, 인내, 절망, 따스함, 생존의 감정 등이 뒤섞여 진한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나문희의 표정과 대사는 관객을 쥐고 흔들며 감상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민재와 산보하기 위해 남산에 올라와서 파워워킹을 하는 영화 마지막 즈음의 옥분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강인한 한 인물의 이미지이다. 오롯이 서포터의 역할에만 머물며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매력을 유지하는 이제훈의 연기 또한 좋다. <파수꾼>, <고지전>, <건축학개론>으로 시작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박열>, <아이 캔 스피크>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필모그래피 또한 또래 남성 배우들에 흥미진진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는 영화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써 두드러지는 단점들이 보이고, 영화의 장점이 이를 모두 가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인물들 그려내는 방식에 있는 성취는 놀랍고 뛰어나다. 피해자에 대한 비윤리적 전시와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영화들에 비해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주는 태도는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일까? 역사의 피해자를 한 개인으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관객이 느낄 부채의식을 온전히 담아낸 첫 영화가 아닐까?

<춘천, 춘천>에 이어 장우진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춘천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겉으로 보이는 틀은 전작과 유사하다. 영화는 춘천을 배경으로 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 20대 청년 커플인 군인(우지현)과 여자(이상희)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흥주와 은주는 20여 년 만에 청평사를 찾는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은주는 핸드폰을 두고 왔음을 기억해낸다.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간 둘은 청평호를 건너는 배가 끊기는 바람에 그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같은 시간, 젊은 군인과 여자는 청평사를 돌아다니다 배 시간이 끊겼음을 알게 된다. 청평사에서의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기묘한 만남과 대화가 <겨울밤에>의 이야기다. 



중년과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 안에서 순환한다는 구조는 같지만, 그들이 직접 대면하지 않았던 <춘천, 춘천>과는 달리 <겨울밤에>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서로 만나게 된다. 두 커플의 시간선, 거기에 흥주와 은주의 시간선이 분열되며 영화 속에 여러 개의 시간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언뜻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들은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이 공유하는 유사한 상황을 통해 순환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은 흥주가 보게 되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이나, 폭포 밑 얼음에서의 위험천만한 상황 등을 통해 분열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은주는 얼음에서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군인과 여자를 만나며 위험을 모면하고 그들과 대화한다. 흥주와 함께하는 시간선에서 분열되어 나온 은주는 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커플을 응시하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다시 봉합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반면 흥주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을 쫓아간다. 그는 핸드폰을 두고 온 은주를 탓하면서 자신도 장갑을 땅바닥에 두고 온다. 첫사랑 또한 유령처럼 등장하여 유령처럼 사라진다. 흥주의 분열은 봉합으로 향하지 못하고, 잃어버림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프닝과 유사하다.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택시기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흥주와 은주를 청평사 밖으로 실어 나른다. 갑자기 내려달라는 은주의 말에 흥주도 따라 내리고, 잠시 멈춘 택시 앞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누군가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다른 상황에서, 마지막의 마주 보기는 불완전한 봉합으로 마무리된다. 산장의 방에서 흥주와 은주가 함께 앉아있던 방에 비치는 열풍기의 붉은빛은 절대 두 사람 모두를 한 번에 비추지 못한다. 그들을 한 번에 비추지 못하는 경고등 같은 온풍기의 빛이나 겨울의 달빛은 진작의 둘의 봉합 불가능성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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