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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회 제주여성영화제에 다녀왔다. 다른 해 같았으면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있었겠지만, 올해는 애인의 단편 다큐멘터리가 제주여성영화제에 초청되어 제주도에 다녀왔다. 그 동안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인권영화제 등 서울에서 열리는 여성영화제에는 관객으로 참여해왔지만, 서울 밖에서 열리는 여성영화제는 처음 찾는 거라 여러모로 기대가 컸다. 게다가 제주도에서 하는 영화제라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영화제 일정과 태풍 '콩레이'의 영향이 딱 겹쳐 하마터면 제주도에 가지도 못할 뻔했다. 원래 5~6일에 제주도에 머물면서 영화제에 참석하고, 6일 저녁에 부산으로 떠나 부산국제영화제에 잠시 들르려 했으나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되고 뱃길도 끊겨 제주도에 주말 내내 머무르게 되었다. 5일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도 40분 가량 지연되었기에, 미리 부산행 비행기를 취소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제주여성영화제는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 메가박스에서 진행된다. 오래된 극장이지만, 오래된 극장에서 진행되는 영화제에 가게 되면 느낄 수 있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극장 입구에서부터 영화제를 알리는 입간판과 시간표가 걸려 있었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7층 로비에는 그 날 상영되는 작품들에 대한 소개가 있다. 이 날은 영화제 경쟁부문인 '요망진 당선작' 섹션의 작품들이 상영되는 날이었기에, 애인의 작품인 <다른, 사람> 등의 스틸컷과 영화의 키워드가 소개되어 있었다. 


 여느 영화제처럼 포토존도 있고, 영화제마다 있는 프로그램 북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영화제와는 다르게, 프로그램 북 뒷쪽에 상영되는 영화들의 모든 감독들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영화제의 참가한 감독들의 얼굴들을 모아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제주여성영화제가 감독들에게 지닌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일요일 다시 찾은 극장에는 폐막작인 아녜스 바르다와 JR의 <얼굴들, 장소들>(국내 개봉제목 보단 원제가 훨씬 좋다...)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영화제 자원봉사자가 수채화로 그린 작품인데, 영화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영화제에서 단편 7편, 장편 1편을 관람했다. 각 영화들에 대한 짧은 리뷰를 아래 쪽에 적어본다.



 <다른, 사람> 김세영 2017 

 이번에 영화제를 찾게 된 이유인 애인의 연출작이다. 이 영화는 강화길 작가의 단편소설 『호수-다른 사람』을 여러 인터뷰이에게 읽게 한 뒤, 그에 대한 각각의 다른 반응들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은 한 여성이 남성과 함께 다니게 된 상황에서 겪는 불안감을 그린 작품인데,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은 소설 속 주인공에 공감하며 같이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주인공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인공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크게 가시화된 여성 대상 범죄와 그러한 폭력에 평소에도 불안감을 가져야 하는 여성의 삶에 주목한다.


 <골목길> 오수연 2017

 영화가 시작하면 고등학생인 문영이 어느 골목길에서 정체불명의 남성에게 성추행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후 영화는 문영과 그녀의 절친인 은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문영은 사건 이후 항상 지나가던 골목길을 돌아서 가게 되는 은채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문영은 은채에게 계속해서 좋아하는 감정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초반의 성추행 장면과 후반부의 고백이 한 영화 안에서 유기적인 서사를 이루지 못하고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주지만, 많이 다뤄지지 않았던 청소년 퀴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두 배우의 연기와 감정선 또한 좋았다. 11월에 열릴 서울프라이드영화제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다.


 <옆길> 김주혜, 이수빈 2018

 체대를 같이 나온 주혜와 수빈은 이제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어딘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낀 둘은 걸어서 서울을 여행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 여행에는 무조건 걸어서만 이동할 것, 축구와 리코더 연주가 함께 할 것, 집에 들어가지 않고 모텔이나 찜질방을 이용할 것 등의 세 가지 규칙이 있다. 이들은 결국 이 여행을 통해 행복을 찾거나 정의내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들의 유쾌한 여정을 보는 즐거움과, 그 동안 <잉여들의 히치하이킹>과 같은 남성들의 셀프-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야기된 여정을 여성의 시선으로 실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자유연기> 김도영 2018

 최근 김도영 감독이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판 연출을 맡게 되며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많은 관객들에게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제 막 육아를 시작한 전직 배우 지연을 주인공으로 한다. 남편은 여전히 연극일을 하고 있지만, 지연은 아이의 탄생과 함께 연기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자신의 일을 핑계로 육아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지연에게 공감해주지도 못한다. 그러던 중 지연에게 유명 감독의 영화 오디션 메일이 온다. 건조한 톤으로 묘사되는 지연의 고된 일상과, 이러한 고통이 자유연기로 승화되는 후반부는 김도영 감독이 왜 <82년생 김지영>의 연출자로 적합한지 알려주는 것만 같다. 비록 후반부에 펼쳐지는 배우의 열연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는 인상이 짙지만, 육아하는 여성의 일상을 극사실주의로 담아낸 영화의 힘은 놀랍다.


 <학교 가기 싫은 날> 김수정 2017

 몇 년 전, '깔창 생리대'를 다룬 기사를 통해 가시화된 저소득층 청소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주인공인 은정은 아버지 몰래 학교를 결석하는데, 그것은 생리대가 없는 상황에서 생리가 터져 학우들에게 놀림 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영화는 덤덤한 태도로 은정이 겪는 현실을 담아낸다. 다만 영화는 이미 관객들이 접했을 기사의 내용을 영상으로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기만 하다. 재현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아역배우 박웅비> 김슬기 2018

 제목대로 아역배우인 박웅비의 이야기이다. 웅비는 같이 연기하는 친구들처럼 우는 연기를 잘 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대사도 척척 외우고, 엄마가 주는 대본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가며 연습하는 모습은 이미 프로 배우이지만, 우는 연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아쉬워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연기학원에도 가보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웅비의 생활은 여느 배우의 삶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우는 법을 배우지 못해 좌절하고 실패하는 웅비의 모습을 그린다기 보단,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포기 한 뒤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그려낸다. 웅비의 압도적인 연기(영화 속 아역배우들은 모두 본명으로 출연한다)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 속 캐릭터의 모습과 실제 배우의 모습을 겹쳐보이게 해 영화의 다양한 결을 불어 넣는다.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이 작품을 볼 이유는 충분하다.


 <증언> 우경희 2018

 혜인은 경력증명서를 받기 위해 퇴사한 회사를 오랜만에 찾는다. 찾는 김에 간식값을 떼어 먹은 과장에게 돈을 받아낼 결심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회사에 아직 재직 중인 이 대리에게 성추행 피해에 대한 증언을 해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는다. 혜인은 재취업을 위한 면접에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 고민하지만, 남성 호모소셜로 구성되고 이것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다른 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이 대리에게 연대하기로 결심한다. <증언> 또한 <학교 가기 싫은 날>처럼 사건의 재현을 다루는 수준에 그친다. 다면 여성간 연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 그 것을 드러내는 방식과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를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파도 위의 여성들> 다이애나 휘튼 2014

 영화는 낙태가 금지되어 낙태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여성단체 '우먼 온 웨이브'(Women On Wave)의 활동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단체의 설립자인 레베카 곰퍼츠는 낙태가 금지된 국가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낙태를 돕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낸다. 바로 국경 밖 지역인 국제수역에서 낙태가 합법인 네달란드 국적의 배를 타고 여성들에게 낙태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히 여성들의 낙태를 돕는 것을 넘어, 낙태를 금지하는 남성 권력자들의 무논리한 논리를 지적하고, 낙태가 불법인 국가들의 여성운동과 전반적인 사회적 의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들의 활동은 낙태가 불법인 국가들의 여성들을 돕는 웹사이트 '우먼 온 웹'(https://www.womenonweb.org/)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가 담아내는 이들의 활동은 용기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보여주고,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용기와 연대를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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