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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우>부터 <인시디어스> 시리즈까지 꾸준히 공포영화들에 출연해오다 <인시디어스3>를 통해 연출자로 데뷔한 리 워넬의 두 번째 연출작 <업그레이드>가 개봉했다. 영화의 설정은 언뜻 익숙하게 느껴진다. 사고로 아내 애샤(멜라니 밸레조)를 잃고 사지가 마비된 그레이(로건 마샬 그린)는 자신의 고객인 반도체 기업의 창립자 에론(해리슨 길벗슨)에게 어떤 제안을 받는다. 스템(STEM)이라는 칩을 척추에 이식하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제안. 모든 게 자동화된 세상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하던 그레이는 결국 에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던 중 스템이 그레이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가 당한 사고 뒤에 음모가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가 복수하기를 종용한다. 그렇게 그레이는 스템의 도움을 받아 복수를 시작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음모가 더욱 거대했음이 드러난다.



 <업그레이드>는 드라마 <블랙미러>의 한 에피소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문명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그려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결국 기술에 인간이 굴복하거나 지배당하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는 세계관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블랙미러>를 비롯한 여러 SF영화에서 그려진 미래적 이미지와 설정들을 가져오고, 그것을 이용해 액션을 선보이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다. 예고편에서도 드러난 독특한 카메라 워크와, 스템에게 자신의 몸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그레이(의 몸을 사용하는 스템)의 액션이 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액션 시퀀스의 카메라는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거나 단순히 액션의 동선을 담아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를 빌린 기계가 액션을 선보이는 만큼, 카메라는 그레이의 상체에 고정된 것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액션의 합 자체는 인간의 신체를 기계가 움직이는, 혹은 기계화된 신체가 움직이는 영화들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것이지만, <업그레이드>의 카메라는 약간의 변화를 줌으로써 저예산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이는 기계-인간, 아날로그-디지털의 결합이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반영하기도 한다. 가령 스템의 작동이 중지되는 상황에서 시점 쇼트가 아님에도 카메라가 그레이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는 장면 등이 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 내내 반복되다 보니 산만해지는 경향도 있다. 중후반부 몇몇 액션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과도하게 그레이를 쫓아가 액션을 제대로 담지 못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업그레이드>는 영화의 세계관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점점 산만해지는 액션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이 영화가 설정한 세계관일 텐데, <업그레이드>는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레이가 보여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의 부딪힘 혹은 융합이나, 엔딩에서 벌어지는 사건 등을 더욱 섬세하게 다뤘다면 수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물론 리 워넬이라는 연출자의 기존 출연작 또는 제작한 영화들을 보면 그가 SF를 통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폭력을 담아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거기에 블룸하우스라는, 최소비용 최고효율을 추구하는 제작사가 함께하여 탄생한 작품이 <업그레이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아쉬움은 많지만, 킬링타임용 10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니까 말이다.

<하이라이즈> 등을 연출했던 벤 휘틀리가 액션 영화를 연출했다. 총기 거래를 진행하는 두 갱단이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는 단순한 플롯을 가진 영화 <프리파이어>는 낡은 창고라는 단 하나의 공간과 13명의 등장인물(목소리까지 14명)만이 등장한 간결한 작품이다. 크리스(킬리언 머피), 프랭크(마이클 스마일리), 버니(엔조 실렌티), 스티브(샘 라일리)는 총을 사러 왔고, 버논(샬토 코플리)과 마틴(바부 치세가), 해리(잭 레이너), 고든(노아 테일러)은 총을 팔려하며, 오드(아미 해머)와 저스틴(브리 라슨)은 두 집단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개인이다. 이들이 낡은 창고에 모여 총기 거래를 진행하던 와중에, 거래 전날 술과 약에 취한 스티브가 해리의 사촌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두 집단 사이에 총알이 오가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호위(패트릭 버긴)와 지미(마크 모네로)가 라이플로 그들을 저격하려 한다.



 <프리파이어>의 기본 세팅은 단순하다. 편 가르기는 단순하고, 총격전의 시발점이 되는 스티브와 해리의 갈등도 깔끔하게 등장하고, 총격전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인물의 팔다리에 총알이 한두 방씩 박혀 모두가 땅을 기어 다니게 된다. 크리스, 프랭크, 스티브, 저스틴, 오드, 버논, 해리 등주요 캐릭터들의 성격 역시 총격전 이전의 장면들에서 확실하게 제시된다. 총격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10~15분의 준비시간이 지나면, 남은 러닝타임 동안 질질 끄는 시간 없이 총알과 욕설과 대사가 난무하는 난장판이 펼쳐진다. <하이라이즈>의 과시적인, 혹은 늘어지는 디졸브 몽타주 플래시백 같은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리얼타임에 가깝게 진행되는 영화는 그저 난장판을 즐길 수 있도록 낡은 창고로 관객을 안내한다. <프리파이어>는 ‘재미’라는 키워드에 아주 충실한 장르영화다. 또한 영화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요소들, 가령 전화라던가 총격전 이후에 창고를 찾은 리어리(톰 데이비스) 등의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때문에 각자의 이유로 악인이며 서로에게 욕설을 담은 입과 총구를 겨누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싸움과 그 결과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여성 캐릭터인 저스틴과 흑인 캐릭터인 마틴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모두가 백인 남성인 <프리파이어>에서 두 인물만이 일종의 소수자성을 띠고 있다. 창고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 등장한다. 끊임없이 욕설을 포함한 대사를 뱉어대는 목소리들은 프레임 밖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영화 속 백인 남성들은 잊을만하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저스틴과 마틴은 어느샌가 영화에서 사라진다. 저스틴과의 데이트를 약속한 크리스는 저스틴에게 계속해서 창고 밖으로 도망칠 것을 요구하고, 그녀가 어느 정도 현장에서 벗어난 순간 카메라는 자신의 프레임 속에 그녀를 담지 않는다. 마틴은 총격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총격을 당한다. 그는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다. 사실 아직 죽지 않았다며 일어나 상황을 반전시키는 듯했으나 다시 영화에서 퇴장당하고 만다. 저스틴은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인물들은 끊임없이 영화 속에 존재했다면, 저스틴과 마틴은 영화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만 프레임 속에 소환된다. 저스틴을 데이트 대상 그 이상도 이하로도 대하지 않는 크리스와 버논의 태도와 더불어,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사용하는 벤 휘틀리의 방식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프리파이어>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90분의 짧은 러닝타임은 그것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간다. 두 차례 흘러나오는 존 덴버의 ‘Annie’s Song’은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시대를 알려줌과 동시에 쓸데없는 센티멘탈함을 집어넣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상영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최근의 상업영화들이 이렇다 할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와중에 극악의 상영 환경에 놓인 <프리파이어>는상영관이 적은 게 아쉬운 즐거움을 제공한다.

배급사와 제작사 로고가 지나가고, 휘파람 소리와 숨소리가 함께 들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1인칭의 화면 속으로 권총을 쥔 팔이 나타나 적들을 몰살한다. 권총부터 쌍칼, 도끼 등 다양한 무기들의 향연이 이어지고, 수많은 무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1인칭 시점으로 5분 가까이 이어지던 액션은 거울을 통해 1인칭 시점의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맞이하고 3인칭으로 바뀌어 액션을 이어간다. 100명에 가까운 적들을 죽인 숙희는 경찰에 체포된다. 국정원의 권숙(김서형)은 숙희와 같은 여성 암살자들을 스카우트해 10년간 헌신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숙희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지시를 따르지만,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이자 이전 조직의 보스 중상(신하균)이 나타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성 원톱 주연의 강렬한 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뤽 배송의 <니키타> 나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른다. 1인칭 시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는 영화 전체가 1인칭이었던 <하드코어 헨리>를연상시키며,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복도에서의 혈전은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이나 박찬욱의 <올드보이> 속 장도리 액션 시퀀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숙희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집어 든 장면에서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이나 이두용의 <흑설>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검은 옷을 입고 총기를 다루는 숙희의 모습은 <존 윅> 속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을 연상시키시도 한다. 현수(성준) 캐릭터는 <차이나타운>의 석현(박보검) 캐릭터와 닮았다. <악녀>라는 제목은 김기영 감독이 다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린 액션배우다>와 <내가 살인범이다>를연출했던 정병길 감독의 신작 <악녀>는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게도, <악녀>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장점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동시에 앞선 영화들의 단점이 <악녀>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서울 액션스쿨 출신인 정병길 감독답게 액션에 대한 의욕이 넘친다. 예고편을 포함한 홍보 과정에서도 액션에 중점을 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녀>는 다른 영화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들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며, 단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가령 후반부 숙희와 중상의 칼싸움에서 자동차 추격전으로, 마을버스에서의 혈전으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10분가량의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숙희의 시점뿐만 아니라 중상의 시점까지 오가는 카메라는 현란하게 움직이고, ‘이렇게까지 카메라를 집어넣을 수 있어?’라는 놀라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현란함에 파묻혀 타격의 순간을 놓치고, 멀미 나도록 흔들리는 카메라는 배우의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악녀>를보고 나면 숙희가 영화 내내 펼친 액션의 동작보다 카메라의 현란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던 카메라가 정작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점을 오가느라 카메라가 움직여야 하기에 액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늘어지는 액션은 잘 짜인 액션 안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1인칭임에도 관객이 액션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들고 있고, 그들이 숙희를 공격할 시간은 벌어진 액션의 틈 사이에 충분히 존재하지만, 롱테이크와 1인칭 액션을 고수하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시퀀스가 진행된다. 액션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에너지는 스크린 밖으로 넘쳐흐를 정도이지만 그저 현란하기만 한 카메라는 이를 다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액션 시퀀스들은 존재한다. 가령 초반 5분 정도의 1인칭 시점이 끝나고 거울을 이용해 3인칭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으로만 이끌어 나갈 영화가 아니기에 3인칭 시점으로 빠져나올 시점이 필요했는데, 그 타이밍에 대한 고민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숙희가 물병으로 자동차 엑셀을 고정시키고 도끼를 쥔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운전하는 후반부 추격전의 아이디어 역시 훌륭하다. 굉장히 잔혹해진 <폴리스 스토리> 속 성룡의 2층 버스 액션을 보는 것 같다. 자동차의 앞뒤 양옆으로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김옥빈의 표정은 액션 장면을 배우가 진심으로 즐기며 촬영했다는 것을 관객에게까지 전달한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 자체는 아쉽지만, 쌍칼을 휘두르는 김옥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옥빈의 팬에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풍기 구멍을 통해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숙희의 이미지는 <악녀>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사실 <악녀>의 가장 아쉬운 점은 (물론 아쉽긴 하지만) 액션이 아니다. 123분의 러닝타임이 액션 시퀀스들로 타이트하게 채워진 영화였다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 숙희의 모성애, 숙희의 국정원 훈련과정, 숙희와 현수의 멜로드라마 등을 모두 한 영화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이야기는 물론 인물의 감정선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 주인공읜 숙희의 감정선마저 들쭉날쭉한 상황인데, 영화는 현수와 중상의 감정선까지 담아내려 하니 이야기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성준이 연기한 현수 캐릭터는 그 존재 이유를 찾기 힘들다. 결혼식 장면을 넣기 위함이었던 것인지, 언더커버 남성 캐릭터를 넣고 싶다는 감독의 과욕이었는지, 숙희의 모성애를 강조해보려는 시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선으로 현수 캐릭터를 바라보아도 실패한 캐릭터이다. <차이나타운>의 석현처럼 아이캔디 캐릭터의 미러링 정도로 존재했다면 오히려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현수와 숙희 사이에 애정이 생기는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TV 드라마처럼 연출되어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를 담아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둘의 과거를 그려내는 방식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보여줌으로써 러닝타임을 연장시키기만 한다. 플래시백이 아닌 대사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나,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끝없는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악녀>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악녀>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악역의 부재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를 생각해보면 악역의 부재가 영화를 얼마나 늘어지게 만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영화는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영화의 포문을 연 뒤, 악역이 부재한 상태로 러닝타임의 3분의 2 정도를 흘려보낸다. 주인공 캐릭터의 목적이 명확하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흘러가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숙희의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국정원의 훈련부터 현수와 중상과 얽힌 이야기까지 진행되지만, 명확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는 따분하기만 하다.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는 현수의 이야기와 불필요한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만 잡아먹은 중상의 이야기를 덜어내고, 영화의 악역을 조금 더 빨리 드러내어 확실한 목적을 가진 숙희가 돌진하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아쉬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녀>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여성 원톱 주연의 액션 영화로 홍보되었다. 여기에 김옥빈과 김서형이라는 캐스팅은 연기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김옥빈과 김서형을 멋있게, 그것도 존나게 멋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구린 대사들을 읊는 김서형을 보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치솟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악녀>는 여성이 없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몇 되지 않는다. 숙희, 권숙, 숙희의 딸인 은혜, 국정원에서 훈련받는 여성들, 은혜를 돌봐주는 아주머니들. 그들을 제외한 국정원 간부와 현수의 동료들, 숙희가 오프닝에서 몰살시키는 100여 명의 사람들과 중상의 조직원들, 단역으로만 등장하는 경찰마저도 모두가 남성이다. 다시 말해서 <악녀>는여성 원톱 영화이지만, 주인공과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단역들을 제외하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국정원에서 훈련을 받는 여성 킬러들의 수만 얼추 100여 명은 되어 보이는데, 어째서 밖의 악당들은 모조리 남성인 것일까? 국정원의 높으신 분들부터 여성혐오적 농담을 일삼는 말단 직원들까지 모두가 남성인 와중에 숙희와 권숙이 멋지다는 이유로 <악녀>를 여성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수와 중상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숙희의 감정선을 포기한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정병길 감독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를 보고 숙희 캐릭터를 연상시켰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가 꽂힌 이야기는 그러한 멋진 여성의 이미지이지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악녀>라는 제목에 맞지 않게, 숙희는 영화 속에서 가장 선한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목적에 맞춰 숙희의 감정을 이용한 중상과 권숙에 비교하면 숙희는 전혀 악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는 숙희의 모습은 안티 히어로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붙여진 영화 속 캐릭터에서 숙희보다 선한 캐릭터는 그의 딸인 은혜뿐이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이미지만으로 악녀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서, 모성애를 캐릭터 서사의 중심으로 정하는 것은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남성 창작자의 지루하고 게으른 발상으로만 느껴진다. 가부장제 중심 사회 속에서 자라난 모성애와 눈 앞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로만 쌓아 올려진, 수동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를 ‘악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악녀>는 제목이 품게 하는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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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이 돌아왔다. 2014년 키아누 리브스의 부활을 알린 작품 <존 윅>이 스케일과 세계관을 확장한 속편 <존 윅: 리로드>를 내놓았다. 전편에서 화끈한 복수를 선보였던 존 윅이 이번 속편에서는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맺었던 피의 맹세 때문에 다시 복귀하게 되는 모습을 그린다. 단순한 이야기, 단단하고 디테일한 세계관, ‘이렇게까지 해준다고?’싶을 정도의 액션, 키아누 리브스를 비롯해 루비 로즈, 커먼, 로렌스 피시번 등 적절하고 매력적인 캐스팅, 뜻밖의 코믹한 장면까지 순수 오락영화로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아직 2월이지만 올해 최고의 팝콘무비가 이미 나와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15분이 지나면 킬 카운트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라는 어느 매체의 평만큼 <존 윅: 리로드>를 잘 설명하는 평은 없는 것 같다. 반강제로 은퇴한 세계에 복귀하게 된 존 윅이 미션을 수행하고 복수를 이어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학살에 가깝다. 권총과 단검은 물론, 각종 라이플에 이어 샷건까지 등장하는 이번 영화의 액션은 전편에서 보여준 총기 액션의 제대로 된 확장판이다. 여러 명의 적과 싸우다가 샷건의 총탄이 떨어지자 총신으로 적의 가슴팍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뒤 장전하고 그대로 격발 하는 장면처럼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도 되나 싶은 액션이 계속 이어진다. 전편에 이어 등장하는 차를 무기로 이용하는 카체이싱, 존 윅과 카시안(커먼)의 둔탁한 근접 격투, <용쟁호투>의 거울의 방 장면을 존 윅 스타일로 완벽하게 변용한 후반부 장면 등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액션이다.


 <존 윅: 리로드>에는 전편과 다르게 코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한 존 윅이 ‘소믈리에’를 찾아가 메인부터 디저트까지 각종 총기류를 시음하는 장면은 계속해서 키득거리게 만든다. 어딘가 진지하게 시음을 이어나가지만 묘하게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등에서의 비슷한 장면들이 연상되지만 이번 영화에서 무기를 고르는 장면은 어딘가 매력적이었다. 존 윅과 카시안의 싸움은 투박하면서 묵직한 맨몸 격투와 건 발레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첫 격돌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은 격투 도중 폭력이 금지된 콘티넨탈 호텔로 들어가게 된 둘이 얼떨결에 싸움을 멈추고 술을 마시는 장면과 소음기 총을 이용한 재치 넘치는 장면이었다. 영화 속 킬러들의 프로페셔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생각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그 룰을 관객에게 확실히 납득시켰기에 가능한 장면이다. 소음기 장면은 심지어 둘이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고강도의 무술과 총격, 운전 훈련을 통해 존 윅으로 거듭난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 갔다. 전편에 이어 이번에도 “I’m Back!”을외치는 그의 모습은 존 윅 그 자체이다. 뜻밖의 신스틸러였던 커먼의 액션과 연기 역시 만족스러웠다. 액션 영화 장르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가는 그의 커리어가 꽤 흥미롭다. 2003년 <매트릭스: 레볼루션> 이후 14년 만에 한 영화 안에서 키아누와 재회한 로렌스 피시번이 등장하는 장면은 <매트릭스>의 팬으로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모피어스와 네오가 오랜 세월이 지나 재회하는 느낌이 들었다. 짧고 굵은 로렌스 피시번의 연기 역시 만족스러웠다. 복수의 대상 산티노(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의 부하 아레스로 등장한 루비 로즈는 매력적인 여성 액션 스타의 탄생을 알린다. 수화를 사용한다는 설정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레이드 2>의 장도리 장면을 연상시키는 빠른 액션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차기작이 <피치 퍼펙트 3>라는 것이 루비 로즈라는 배우에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게 만든다.


 <존 윅: 리로드>는 오락영화로써 더 바랄 게 없는 수작이었다. 기대했던 액션과 세계관에 이어 예상치 못한 코미디까지 최고의 팝콘무비였다.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가 어느 빌딩 외벽에 영사되는 것을 비추며 시작하는 영화는 순수한 액션이 주는 오락이 <존 윅>의 정체성이라고 선언한다. 속편을 암시함과 동시에 영화 속 이야기를 깔끔히 마무리하는 엔딩은 3편의 대한 기대감을 무한대에 가깝게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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