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켄드릭'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히트>, <스파이>, <고스트버스터즈> 등을 통해 버디 액션, 첩보, SF 판타지 등의 장르를 여성중심적 영화로 재해석해온 폴 페이그가 이번엔 필름 누아르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출했다. 그의 신작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싱글맘인 스테파니(안나 켄드릭)가 아들의 친구의 엄마인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우연히 친해지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스테파니는 자신의 브이로그 방송 중 에밀리가 실종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스테파니는 자신과 에밀리의 아들들을 데리고, 에밀리의 남편인 숀(헨리 골딩)과 함께 에밀리의 행방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스테파니는 그 에너지를 사용해 에밀리와 그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브이로그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라는 두 여성 캐릭터가 필름 누아르의 클리셰를 비틀며 충돌하는 작품이다. 많은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팜므파탈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캐릭터가 사망, 실종, 납치, 잠적 등 비밀을 품은 상태로 사라진 채 탐정 내지는 형사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비밀을 파헤치는 구도를 취한다. 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는 탐정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없다. 에밀리의 남편인 숀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캐릭터는 단순히 체스판 위의 말 하나에 그친다. 폴 페이그는 남성 탐정 캐릭터 대신 에밀리와 스테파니 두 캐릭터를 모두 팜므파탈 캐릭터로 위치시킨 뒤, 스테파니의 캐릭터를 탐정 캐릭터로 변신시킨다. 이러한 역할 변화는 <스파이>나 <고스트버스터즈>에서 직업이나 영화 속 역할에 얽힌 젠더 역할을 가지고 놀며 작품을 이끌어가던 모양새를 연상시킨다. 거기에 브이로그, 의상의 변화, 조연과 단역의 캐스팅에서도 젠더와 인종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한 것 등이 이 영화의 세련됨을 알려준다.



 다만 아쉬운 지점은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에밀리와 스테파니의 키스는 그냥 그 장면 하나로만 흘러 지나간다. 두 여성 간의 성애적 관계는 영화 말미까지 도통 그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팜므파탈과 팜므파탈의 충돌을 영화의 기본 설정으로 삼았다면, 그러한 설정을 디나이얼 레즈비언들의 로맨스 서사로 결말을 맺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설정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캐릭터의 키스 장면이 등장함에도 이러한 맥락을 영화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한계점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한계점은 <스파이>나 <히트> 등 폴 페이그의 가장 좋은 영화들에 비해 아쉽다는 인상을 줄 뿐, 여전히 폴 페이그의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즐겁게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폴 페이그의 차기작 리스트에는 이번 영화에도 출연한 헨리 골딩을 비롯해 에밀리아 클라크, 엠마 톤슨, 양자경 등이 출연하는 로맨틱 코미디와 <히트>의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일정이 밀리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2년 동안 매년 폴 페이그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으니, 매년 최소 한 편의 끝내주는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라 여기고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비평적으로 큰 성과를 올린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의 공동연출자이자 원작 그래픽노블을 쓴 마르얀 사트라피의 2014년 연출작 <더 보이스>가 뒤늦게 한국에 개봉했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제리(라이언 레이놀즈)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공장 노동자인 제리에겐 동료들은 모르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있다. 게다가 그는 종종 자신이 기르는 개 그리고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느 날 공장 경리부의 피오나(젬마 아터튼)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사고로 인해 그를 죽이게 된다. 이후 제리는 이를 모르는 다른 경리부 직원 리사(안나 켄드릭)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어느 날 리사가 제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싸이코 연쇄살인마의 속내를 다룬다는 점에서 TV시리즈 <한니발> 등의 작품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언 레이놀즈나 안나 켄드릭 등의 캐스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코미디의 톤을 띈 초반부와 밝은 톤의 이미지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다. 




 <더 보이스>는 상당히 애매한 작품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싸이코 살인마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 가령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발레리 코흐)의 죽음에 대한 기억, 정신분열증적인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집의 두 모습 등은 기대보다 잘 연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살해하는 대상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다소 유아적으로 그려지는 제리의 성격을 묘사하는데 할애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극 중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제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재료로 소비되고 만다. 이러한 장치는 종종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대게 남성 주인공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여성 캐릭터를 착취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리사와 피오나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정신과 상담사인 워렌(재키 위버) 캐릭터 또한 제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게다가 엔딩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더 보이스>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해결은 여성 캐릭터들을 그저 소비했다는 비판을 더욱 강화시킨다. 라이언 레이놀즈와 안나 켄드릭 등 출연진의 호연과 시퀀스 단위로는 꽤나 만족스러운 연출에 비해 손쉬운 방식으로 제리라는 캐릭터를 이해시키려 한 각본이 아쉽기만 하다.



 <데드풀>이나 <킬러의 보디가드> 등으로 만들어진 라이언 레이놀즈의 이미지 덕분에 <더 보이스>는 슬레셔 코미디로 홍보되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영화 정보란에도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더 보이스>는 코미디 보단 싸이코 드라마에 가깝다. 제리의 분열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몇몇 장면들은 꽤 탁월하다. 제리의 반려동물들이 건네는 말들은 코미디의 톤을 지니긴 했지만 도리어 그의 심리상태를 다각도로 드러내게 된다. 동시에 제리에 의해 살해된 여성들이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각본이 조금 더 섬세했다면, 조금 더 철저했다면 수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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