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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사와 제작사 로고가 지나가고, 휘파람 소리와 숨소리가 함께 들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1인칭의 화면 속으로 권총을 쥔 팔이 나타나 적들을 몰살한다. 권총부터 쌍칼, 도끼 등 다양한 무기들의 향연이 이어지고, 수많은 무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1인칭 시점으로 5분 가까이 이어지던 액션은 거울을 통해 1인칭 시점의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맞이하고 3인칭으로 바뀌어 액션을 이어간다. 100명에 가까운 적들을 죽인 숙희는 경찰에 체포된다. 국정원의 권숙(김서형)은 숙희와 같은 여성 암살자들을 스카우트해 10년간 헌신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숙희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지시를 따르지만,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이자 이전 조직의 보스 중상(신하균)이 나타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성 원톱 주연의 강렬한 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뤽 배송의 <니키타> 나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른다. 1인칭 시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는 영화 전체가 1인칭이었던 <하드코어 헨리>를연상시키며,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복도에서의 혈전은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이나 박찬욱의 <올드보이> 속 장도리 액션 시퀀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숙희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집어 든 장면에서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이나 이두용의 <흑설>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검은 옷을 입고 총기를 다루는 숙희의 모습은 <존 윅> 속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을 연상시키시도 한다. 현수(성준) 캐릭터는 <차이나타운>의 석현(박보검) 캐릭터와 닮았다. <악녀>라는 제목은 김기영 감독이 다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린 액션배우다>와 <내가 살인범이다>를연출했던 정병길 감독의 신작 <악녀>는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게도, <악녀>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장점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동시에 앞선 영화들의 단점이 <악녀>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서울 액션스쿨 출신인 정병길 감독답게 액션에 대한 의욕이 넘친다. 예고편을 포함한 홍보 과정에서도 액션에 중점을 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녀>는 다른 영화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들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며, 단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가령 후반부 숙희와 중상의 칼싸움에서 자동차 추격전으로, 마을버스에서의 혈전으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10분가량의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숙희의 시점뿐만 아니라 중상의 시점까지 오가는 카메라는 현란하게 움직이고, ‘이렇게까지 카메라를 집어넣을 수 있어?’라는 놀라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현란함에 파묻혀 타격의 순간을 놓치고, 멀미 나도록 흔들리는 카메라는 배우의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악녀>를보고 나면 숙희가 영화 내내 펼친 액션의 동작보다 카메라의 현란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던 카메라가 정작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점을 오가느라 카메라가 움직여야 하기에 액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늘어지는 액션은 잘 짜인 액션 안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1인칭임에도 관객이 액션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들고 있고, 그들이 숙희를 공격할 시간은 벌어진 액션의 틈 사이에 충분히 존재하지만, 롱테이크와 1인칭 액션을 고수하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시퀀스가 진행된다. 액션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에너지는 스크린 밖으로 넘쳐흐를 정도이지만 그저 현란하기만 한 카메라는 이를 다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액션 시퀀스들은 존재한다. 가령 초반 5분 정도의 1인칭 시점이 끝나고 거울을 이용해 3인칭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으로만 이끌어 나갈 영화가 아니기에 3인칭 시점으로 빠져나올 시점이 필요했는데, 그 타이밍에 대한 고민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숙희가 물병으로 자동차 엑셀을 고정시키고 도끼를 쥔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운전하는 후반부 추격전의 아이디어 역시 훌륭하다. 굉장히 잔혹해진 <폴리스 스토리> 속 성룡의 2층 버스 액션을 보는 것 같다. 자동차의 앞뒤 양옆으로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김옥빈의 표정은 액션 장면을 배우가 진심으로 즐기며 촬영했다는 것을 관객에게까지 전달한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 자체는 아쉽지만, 쌍칼을 휘두르는 김옥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옥빈의 팬에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풍기 구멍을 통해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숙희의 이미지는 <악녀>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사실 <악녀>의 가장 아쉬운 점은 (물론 아쉽긴 하지만) 액션이 아니다. 123분의 러닝타임이 액션 시퀀스들로 타이트하게 채워진 영화였다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 숙희의 모성애, 숙희의 국정원 훈련과정, 숙희와 현수의 멜로드라마 등을 모두 한 영화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이야기는 물론 인물의 감정선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 주인공읜 숙희의 감정선마저 들쭉날쭉한 상황인데, 영화는 현수와 중상의 감정선까지 담아내려 하니 이야기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성준이 연기한 현수 캐릭터는 그 존재 이유를 찾기 힘들다. 결혼식 장면을 넣기 위함이었던 것인지, 언더커버 남성 캐릭터를 넣고 싶다는 감독의 과욕이었는지, 숙희의 모성애를 강조해보려는 시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선으로 현수 캐릭터를 바라보아도 실패한 캐릭터이다. <차이나타운>의 석현처럼 아이캔디 캐릭터의 미러링 정도로 존재했다면 오히려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현수와 숙희 사이에 애정이 생기는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TV 드라마처럼 연출되어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를 담아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둘의 과거를 그려내는 방식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보여줌으로써 러닝타임을 연장시키기만 한다. 플래시백이 아닌 대사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나,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끝없는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악녀>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악녀>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악역의 부재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를 생각해보면 악역의 부재가 영화를 얼마나 늘어지게 만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영화는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영화의 포문을 연 뒤, 악역이 부재한 상태로 러닝타임의 3분의 2 정도를 흘려보낸다. 주인공 캐릭터의 목적이 명확하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흘러가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숙희의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국정원의 훈련부터 현수와 중상과 얽힌 이야기까지 진행되지만, 명확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는 따분하기만 하다.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는 현수의 이야기와 불필요한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만 잡아먹은 중상의 이야기를 덜어내고, 영화의 악역을 조금 더 빨리 드러내어 확실한 목적을 가진 숙희가 돌진하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아쉬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녀>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여성 원톱 주연의 액션 영화로 홍보되었다. 여기에 김옥빈과 김서형이라는 캐스팅은 연기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김옥빈과 김서형을 멋있게, 그것도 존나게 멋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구린 대사들을 읊는 김서형을 보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치솟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악녀>는 여성이 없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몇 되지 않는다. 숙희, 권숙, 숙희의 딸인 은혜, 국정원에서 훈련받는 여성들, 은혜를 돌봐주는 아주머니들. 그들을 제외한 국정원 간부와 현수의 동료들, 숙희가 오프닝에서 몰살시키는 100여 명의 사람들과 중상의 조직원들, 단역으로만 등장하는 경찰마저도 모두가 남성이다. 다시 말해서 <악녀>는여성 원톱 영화이지만, 주인공과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단역들을 제외하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국정원에서 훈련을 받는 여성 킬러들의 수만 얼추 100여 명은 되어 보이는데, 어째서 밖의 악당들은 모조리 남성인 것일까? 국정원의 높으신 분들부터 여성혐오적 농담을 일삼는 말단 직원들까지 모두가 남성인 와중에 숙희와 권숙이 멋지다는 이유로 <악녀>를 여성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수와 중상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숙희의 감정선을 포기한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정병길 감독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를 보고 숙희 캐릭터를 연상시켰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가 꽂힌 이야기는 그러한 멋진 여성의 이미지이지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악녀>라는 제목에 맞지 않게, 숙희는 영화 속에서 가장 선한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목적에 맞춰 숙희의 감정을 이용한 중상과 권숙에 비교하면 숙희는 전혀 악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는 숙희의 모습은 안티 히어로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붙여진 영화 속 캐릭터에서 숙희보다 선한 캐릭터는 그의 딸인 은혜뿐이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이미지만으로 악녀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서, 모성애를 캐릭터 서사의 중심으로 정하는 것은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남성 창작자의 지루하고 게으른 발상으로만 느껴진다. 가부장제 중심 사회 속에서 자라난 모성애와 눈 앞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로만 쌓아 올려진, 수동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를 ‘악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악녀>는 제목이 품게 하는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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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듣고 있는 강의-심혜경의 불온한 스크린 관찰기-를 듣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제의 수업이다. 어제 강의의 제목은 “너무나도 촌스러운 그녀의 이름에 대해: 용순이와 미자 그리고 숙희와 미옥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용순>, <옥자>, <악녀> <미옥> 등 2017년에 개봉한, 그리고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들을 다루고 있다. 강의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네 편의 영화는 60~80년대에 주로 사용되던 여성화된 촌스러운 이름들을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우는데, 여성중심적인 영화를 표방한 이들 영화들은 왜 2017년에 다시 이러한 이름들을 소환하는 것일까? 각 영화들의 시대가 <아가씨>처럼 과거의 시점인 것도 아니다. 네 편의 영화는 인물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명백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강의는 2005년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강력한 모성의 힘으로 복수에 성공한 뒤, 이러한 촌스러운 이름의 여성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고, 여러 액션을 벌이는 등 자신들의 육체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이용하며, 동시에 성(姓)이 없고 애인/어머니/딸 등의 관계로써 호명된다.



 이름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지표이기도 하고, 성과 관련된 부분은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써의 개인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결국 ‘이름을 가진다’라는 행위는 개인이 자아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받은 것이든 스스로 지은 것이든)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존재성 자체의 문제와 직결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이 어떻게 작명되었는지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까지 여성의 이름에는 성이 포함되지 않았다(혹은 포함되었더라도 제대로 불리지 않았다). 여성은 가문의 대를 잇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재생산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며느리로서 다른 가문에 보내지고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될 교환물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가문을 잇는 것과는 상관없는, 그렇기에 양반이 아닌 상놈들처럼 성이 필요 없는 존재였을 뿐이다. 역사 속에 기록된 여러 여성들의 이름이 혜경궁 홍씨라던가 폐비 윤씨처럼 남편/아버지의 성으로만 기록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설명된다. 1909년 민적법이 실시되면서 신분과 성별의 구분 없이 성과 이름이 생기게 되고,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과 호적법을 거치며 70년대까지 주로 등장하던 여성화된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령 자(子), 숙(淑), 옥(玉), 순(順), 희(姬) 등 아들을 염원하거나 여성이 순종적이기를 바라는 한자들이 들어간 이름이 곧 여성의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80년대 들어 이름이 현대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는 줄어들게 된다.

 

 공교롭게도 강의에서 다루는 네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앞서 언급한 다섯 한자가 골고루 섞여 들어간 이름들이다. 동시에 그들의 성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이 이름들은 주인공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제목이라는 지위를 꿰차고 있다. 보통 주인공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인 경우, 대부분 위인 혹은 영웅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 <빌리 엘리어트>, <슈퍼스타 감사용> 등의 수많은 예시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촌스러운 여성형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네 영화들의 여성 재현은 어떠한가? 강의는 <용순>과 <옥자>, <악녀>와 <미옥>을 각각 묶어서 설명한다.



 <용순>의 용순(이수경)의 이름의 유래는 “용 ‘용’에순할 ‘순’, 엄마가 용순을 낳을 때 용썼다고 해서 용순’이라고 설명된다. 영화는 출산의 과정을 이름으로 삼은 한 청소녀가 계속하여 달리면서 여러 고민들을 드러내고 결말을 맺는 과정을 담아낸다. <용순>의 용순은 거침없다. 체육선생님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친구들과 저돌적인 전략들을 펼치고,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그들에게 저항 또는 상대한다. 그러나 영화는 용순의 저돌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사춘기 시절의 철없음, 혹은 어느 시골 풍경 속의 아련한 그 시절 정도의 수준으로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봉합, 어른인 새엄마의 개입과 영화 내내 부재하던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방식은 용순의 철없음 혹은 사춘기 시절이라는 한 때로 용순의 행동을 정의 내리며 그녀의 적극성을 희석시킨다. 결국 용순은 ‘순’이라는 이름 그대로 순응하는 순한 여성이 되어 영화가 마무리되고 만다. 시골 학교에 다니는 사춘기 소녀의 이름이 용순이라니, 작명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감성과 어떤 향수가 바로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옥자>의 미자(안서현)는결국 옥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거대 기업인 미란도를 상대로 말이다. 강의에서는 이러한 미자가 아직 여성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아직 톰보이적인 면모를 보이는 아동기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용순이 청소녀로써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캐릭터였다면, 미자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남성성(액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캐릭터이다. 동시에 미자와 옥자의 관계는 여성연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서로가 엄마이자 딸리고 친구이자 연인인 일종의 대안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미자와 옥자라는 이름과 둘의 관계, 최종적으로 미자가 옥자를 구출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결말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한국의 여성들이 부여받은 이름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을 통한 신식민시대의 기업과 어른들과 싸워 이긴다는 서사가 <옥자>의 서사이다. 미자와 옥자라는 여성형 이름은 겉으로는 구별되기 어려운 둘의 성별을 여성으로 상정하면서 둘의승리가 지닌 순수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욕망을 여성(루시&낸시 미란도 - 틸다 스윈튼)으로 표현한 것, 서구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오리엔탈리즘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구도, 어떠한 문제제기나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까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용순>과 <옥자>는농촌 소녀들의 촌스러운 이름을 통해 (아마도 연출자인 남성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노스탤지어를 드러내고, 다가온 테크놀로지 시대에 대한 해결책은 여성의 순수성과 촌스러운 이름에서 드러나는 과거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악녀>와 <미옥>의 테마는 상당히 유사하다. <악녀>의 숙희(김옥빈)는 조선족 출신의 킬러로 중상(신하균)에게 버림받고 한국 국정원의 암살요원으로 일하며 중상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키우다가, 딸과 사랑하는 남자 현수(성준)를 모두 잃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옥>은 조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키운 나현정(김혜수)이 은퇴를 원하면서 상훈(이선균)과 최 검사(이희준), 보스인 김 회장(최무성) 등과 얽힌 관계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내용을 그린다. 당연하게도 현정에겐 김 회장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숙희와 미옥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성을 동력으로 삼는 복수심이다. 숙희는 딸을 잃고, 미옥은 아들과의 삶을 꿈꾼다. 두 캐릭터 모두 자식에 대한 모성애, 연애대상(?)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 아늑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제공되는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등을 보여준다. 극대화된 육체적 능력을 지닌 이 캐릭터들이 기어이 회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으로 봉합되는 가부장제적 정상가족이다. ‘여성 중심 액션 영화’를 표방하고 그렇게 마케팅을 해온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사랑과 모성 없이는 전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모양새다. <악녀>는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과 같은 전근대적 여성 잔혹사의 연장선이고, <미옥>은 오롯이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으로서 현정을 그려낸다. 특히 <미옥>은 여성에 대핸 성적 대상화와 모성이라는 테마, 액션 누아르라는 장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성녀/창녀의 단순 이분법 속에서마저 길을 잃은 채 내러티브 자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두 영화 모두 강인하고 육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설정해 놓고 모성을 강제적으로 주입하여 탄생한 괴작이다.



 물론 두 영화는 백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이다. <악녀>에는 숙희의 상사 권숙(김서형)이 등장하고, <미옥>에는 현정의 밑에서 일하는 웨이(오하늬)가 등장한다. 하지만각각의 캐릭터 역시 모성과 가부장제적인 이성애 시스템이라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 그 밖으로 주인공을 탈출시킬 수 있는 서사를 보여주진 못한다. 결국 두 영화는 남성화된 상업영화계가 지닌 상상력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과거 할리우드로 거슬러 올라가면 <에이리언> 시리즈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 2>의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 등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두 캐릭터 모두 여성이지만, 남성성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총으로 침략자(외계인, 로봇)를 처치한다. 동시에 두 캐릭터에게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는 <악녀>나 <미옥>이 지닌 한계점과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두 캐릭터 모두 모성과 이성애적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캐릭터이며, 한국의 두 영화보다 성공한 이유는 더욱 촘촘한 내러티브와 이를 구현하는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 액션 영웅이라는 존재는 그간 남성성으로 대표되어 온 육체적인 액션을 선보이는 캐릭터이지만, 그들이 강인함이라는 남성성을 지니게 될 경우 모성과 이성애라는 한계를 반드시 두게 된다. 결국 그들이 어떤 개인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욕망, (모성 같은 것을 제외한) 여성성 혹은 여성적인 욕망은 그들이 남성성(액션)을 획득함으로써 거세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성과 (남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이성애를 전면화함으로써만 그들이 지닌 남성성을 전면화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이다.



 또한 숙희와 현정은 리플리나 사라 코너에 비해 섹스어필이 상당히 강조된다. 80년대 하드 보디 액션 영화의 광풍이 휩쓸고 난 뒤인 90년대 <니키타>나 <지. 아이. 제인> 등의 여성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여성 액션 영웅들은 ‘남성 되기’와‘섹스어필’의 두 가지 전략을 병행하게 된다. 리플리와 사라 코너가 아이코닉한 이유는 이러한 전략에서 섹스어필을 배제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숙희와 현정이 보여주는 남성 되기와 섹스어필의 투 트랙 전략은 기본의 남성/여성의 젠더 역할만을 공고히 할 뿐, 진정한 여성 액션 영웅이 등장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만이 이러한 구도 사이에서 여성연대를 이끈 강력한 여성 영웅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강의에서 언급한 것은 퓨리오사까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원더우먼>의 원더우먼을 살짝 끼얹어 보고 싶다. 물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캐릭터가 전개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악녀>와 <미옥>은 충무로가 여성 영웅을 원하는 여성 관객들의 욕구와 페미니즘의 조류의 편승하고자 하는 제작사들의 욕망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낸 신호 이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악녀>와 <미옥>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숙희와 현정은 극 중 이름이 두 가지라는 점이다. 숙희는 국정원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채연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나현정은 미옥이라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과거의 상처 속에 묻어둔다.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을 지닌 개인을 비롯해 가족, 사회, 지역 등의 정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다른 정체성, 관계 등을 재정의한다는 의미이다. 숙희는 채연수라는 이름을 통해 가부장제적 국가 시스템(국정원) 안으로 편입되었고, 미옥은 나현정이라는 이름을 통해 남성화된 조직에 편입된다. 숙희와 미옥이라는 기존의 이름은 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두 인물은 가부장제에서 배제된 주변인으로써의 호모 사케르로 존재했다. 마치 조선시대의 여성들처럼 말이다. 성이 포함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채연수와 나현정은 국가기관과 유사기업이라는 남성적인 가족의 이름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이름에는 숙희와 미옥이라는 자기동일성을 가질 수 있는 기존의 이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파국을 맞이하는 두 이름은, 게다가 숙희와 미옥이라는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이름이 아닌 현대적이며 덜 여성적인 이름은 실패한 이름/캐릭터가 된다. 두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이름은 모성/이성애라는 가부장제적 장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적 욕망을 위해 행동할 수 없도록 서사를 구조화하는 상상력의 집단적 태만이다.

 

 결과적으로 <용순>, <옥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 노스탤지어와 <악녀>, <미옥>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모성, 이성애라는 한계는 공교롭게도 네 작품의 연출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팩트와 연결된다. 각 남성 감독이 스스로 각본을 쓴 네 개의 작품은 그들이 지닌 상상력의 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은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랄까? 여성적 욕망은 무엇일까? 남성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성이 아닌 여성성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갈구하면서도 그것을 탐구하고 상상하지 않는 지금의 태만이 시대착오적인 이름들을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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