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 I&II'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개인적으로 2018년 해외영화들을 일일이 다 챙겨보기도 어려웠다. 영화제를 통해서만 소개된 작품들도 많았던 데다가, 미쳐 참석하지 못한 영화제 상영작들의 소규모 개봉으로 인해 관람을 놓친 작품 등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2018년 한해엔 좋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박스오피스에서는 여전히 MCU의 영화들이 흥행한 한 해였고, <보헤미안 랩소디>가 의외의 대박을 터트리며 다른 한국영화들을 흥행으로 누르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앞서 포스팅한 국내영화와 유사하게, 올해엔 극영화보다 다큐멘터리 등 극영화 밖의 형식을 지닌 영화들에 관심이 갔던 한 해였다.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아직 관람하지 못했지만) 장 뤽 고다르의 <이미지 북>, 넷플릭스를 통해 드디어 공개된 오손 웰즈의 유작 <바람의 저편> 등이 이러한 영화였다. 동시에 여전히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중화권 영화들을 많이 놓치게 된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오손 웰즈 등 거장들의 마지막 작품을 관람할 수 있어서 행복한 한 해였고, <유전>, <콰이어트 플레이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등 큰 재미를 준 장르영화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등의 블록버스터들도 존재했다. 아래 리스트는 올해 영화제, 넷플릭스, 극장 개봉 등을 통해 관람한 영화들 중 가장 관심이 갔거나 흥미로웠던 작품들이다. 



Best 10.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우에다 신이치로 2018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먼저 소개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단연 올해의 장르영화로 불러도 손색없는 작품이다. 세 번이나 극장에서 관람했는데도, 세 차례 모두 박장대소하며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는 정말 손에 꼽을만할 것이다. 37분간의 원테이크 좀비영화와 이를 제작하는 비하인드를 순서대로 보여주는 이 영화를 보고 박장대소하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영화를 만들어봤거나,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창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놀라운 코미디와 형식, 이를 통해 쌓은 페이소스가 주는 엔딩의 감동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Best 9. <씨네필> 마리아 알바레즈 2017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를 즐기는 은퇴여성들의 모습을 기록한 마리아 알바레즈의 다큐멘터리 <씨네필>은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이 영화 속 씨네필들은 영화제를 돌아다니고, 씨네마테크를 다녀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영화제 카탈로그를 기록용과 보관용으로 나누어 챙기고, 시간표에 밑줄을 그어가며 어떤 영화를 관람할지 신중히 선택하는 영화 속 씨네필들의 모습은 매번 영화제를 갈 때마다 반복되는 내 모습과도 유사하다. 심지어 워커나 지팡이를 끌며 상영시간에 맞춰 이동하는 은퇴여성들의 모습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지 못할 관객이 있을까? 



Best 8.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피터 램지, 밥 퍼시케티, 로드니 로스먼 2018

 올해에도 다양한 세계관 속의 슈퍼히어로들이 스크린에 등장했지만, 이 영화는 올해, 아니 슈퍼히어로 영화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레고 무비>의 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가 제작과 각본에 참여하고, <가디언즈>, <어린왕자> 등 다양한 형식의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던 피터 램지, 밥 퍼시케티, 로드니 로스먼 세 감독이 공동연출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오직 애니메이션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끌어 낸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 심지어 극장용 영화를 통해서는 처음 소개되는 마일즈 모랄레스를 비롯해 다양한 스파이더맨들을 등장시키는 방식이나, MCU나 DCFU 등의 실사영화들에선 불가능한 방식으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마일즈 모랄레스의 오리진 스토리인 이 영화는 이러한 요소들을 활용하여 최고의 슈퍼히어로 오리진 영화이자 최고의 스파이더맨 영화를 만들어 냈다. 



Best 7.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유아사 마사아키 2017

 조금 과장해서, 시사회를 통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를 처음 관람했을 때의 느낌은 어릴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를 처음 봤을 때와 유사했다. 어느 섬마을에서 사는 소년과 전설 속의 인어라는 설정은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유아사 마사아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진부한 이야기를 놀랍도록 즐겁게 탈바꿈시킨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일본영화계의 젊은 감독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Best 6. <통행증> 크리스티안 팻졸드 2018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통행증>은 괴이한 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나치를 피해 파리에서 마르세유로 도망친 유대인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영화에 담기는 풍경은 현대의 프랑스이다. 나치의 비밀경찰은 프랑스 경찰의 전투복을 입고 있고, CCTV 화면이 등장하기도 하며, 네온사인 가득한 간판이나 현대의 자동차가 배경 속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현재를 배경으로 이러한 영화를 촬영한 것은 자연스럽게 유럽의 난민 문제를 연상시킨다. 전쟁, 이데올로기 등의 폭력이 발생시킨 난민은 70년 정도의 세월을 통과하여 현재에 도달한다. 크리스티안 팻졸드는 괴이하면서도 우아한 선택을 통해 <통행증>을 만들어냈고, 현재진행형의 문제를 그 자체로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Best 5. <녹색 안개> 가이 매딘, 갈렌 존슨, 에반 존슨 2017

 가이 매딘과 존슨 형제의 신작 <녹색 안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중심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영화외 TV쇼들의 푸티지를 통해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을 되돌아보는 작품이다. <현기증>의 서사를 중심축으로 삼아, 40년대의 영화와 TV쇼부터 <고질라>나 <산 안드레아스> 등 최근의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다양한 재료의 푸티지가 <녹색 안개>에 사용된다. <현기증> 속 장면과 유사한 장면들을 모아 샌프란시스코의 지역성을 대담하게 재구성하려는 이 시도는, 카메라를 통해 한 지역이 어떻게 담기는지, 이들 푸티지들이 한 지역의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담아내는지를 보여준다. 



Best 4. <24 프레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17

 작년 전주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집으로 데려다 주오>에 이어 다시 한 번 전주를 통해 소개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 <24 프레임>은 무빙 이미지에 대한 그의 마지막 열정이 녹아잇는 작품이다. 제목처럼 24개의 프레임, 24개의 4분 짜리 쇼트로 구성된 이 영화는 영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쇼트 속의 운동을 천천히 응시한다. 실제 촬영과 CG를 교묘히 뒤섞어 분간하기 어려운 <24 프레임>의 쇼트들은 방식을 가리지 않고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운동을 주목한다. 영화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24 프레임>은 올해 가장 순수한 시네마의 체험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Best 3. <더 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2017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언제나 대단했다. 그가 블록버스터를 만들던, 작가주의적 영화를 만들던, 그의 영화는 언제나 영화적인 체험 자체에 주목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베트남전 문서 폭로를 소재삼은 <더 포스트>는 언론의 역할, 페미니즘, 연대 등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에 대해 논한다. 관객은 워싱턴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의 상황과 행동을 통해 필요한 가치들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따라오는, 액션영화를 방불케 하는 쇼트의 연쇄는 그저 두손두발 다 들고 이 거장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다. 



Best 2. <얼굴들, 장소들> 아녜스 바르다, JR 2018

 국내에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지만, 이는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공동연출자 JR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기에 원제인 <얼굴들, 장소들>로 표기했다. 올해로 90세가 된 아녜스 바르다의 새 작품은 JR과 함께하는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지역 주민들의 얼굴을 거대하게 프린트하여 공간에 붙이는 작업을 담고 있다. 프랑스의 여러 지역들을 거쳐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누벨바그 세대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 개인의 역사 까지 훑는 이 영화는 여전한 거장의 에너지로 가득한 작품이다. 바르다와 JR, 두 인물이 떠나는 여행은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Best 1. <아사코 I&II> 하마구치 류스케 2018

 310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하마구치 류스케의 전작 <해피 아워>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아사코 I&II> 또한 그만큼 놀라운 작품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아사코, 바쿠, 료헤이라는 세 인물을 통해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다시 말해 포스트-재난과 포스트-자본주의 사회를 맞이한 현재에 지녀야 할 태도를 이야기한다. 서로를 어느 정도는 불신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불신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되는 관계'를 새로운 태도로 제시하는 것은 충격과 납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아직 정식개봉을 한 작품은 아니지만, 올해 관람한 작품 중 이 영화만큼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밖에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 

<바람의 저편> 오손 웰즈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 

<120 BPM> 로빈 캉필로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티븐 스필버그 

<팬텀 스레드> 폴 토마스 앤더슨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하라 카즈오 

<콜럼버스> 코코나다 

<유전> 아리 에스터 

<블랙 팬서> 라이언 쿠글러

*스포일러 포함


 작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러닝타임 310분의 영화를 봤다. 기나긴 러닝타임 때문에 개봉은 못 한 작품이지만, 5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인터미션도 없이 관람하게 한 것은 그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가 가진 힘이다. 그때부터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렸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공개된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은 다행히도 119분의 러닝타임,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몇몇 영화제나 기획전을 통해 소개되었고 내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상상마당 CINE ICON 기획전을 통해 관람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아사코 I&II>는 이상한 영화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3.11 동일본 대지진을 영화 속으로 끌어오고, 멜로드라마의 틀을 통해 재난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오사카에서 살아가던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전시를 관람하다 우연히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라는 남자를 만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둘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쿠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2년 뒤, 도쿄로 거쳐를 옮긴 아사코는 우연히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1인 2역)를 만난다. 너무나도 닮은 모습에 화들짝 놀라지만, 계속해서 마주치면서 아사코는 료헤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사코와 료헤이,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사라졌던 바쿠가 다시 나타난다.


 

 <아사코 I&II>는 이상하다. 이 영화를 모노가미적 이성애 규범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오독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 영화를 통해 붕괴시키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와의 관계를 주저하다가, 3.11 동일본대지진이 있던 날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사라졌던 바쿠는 광고모델이 되어 도시 한복판의 광고판을 통해 재등장한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바쿠가 나타나 손을 내밀자, 주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떠난다. 하지만 아사코는 결국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오고, 료헤이와 아사코는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지만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아사코와 료헤이의 (재)결합은 서로에 대한 불신을 신뢰함으로써 성립되는 기묘한 관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기묘한 관계를 포스트-재난 시대의 새로운 태도로 제시한다. 이 태도는 포스트 뒤에 자본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말들을 붙여도 어느 정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의 세계, 문명이라는 조건이 이제 자연화 되어버린 시대에 지진과 같은 재해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다. 영화 초반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차별 살인/폭행’ 뉴스 또한 통제 불가능한 무엇인가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뢰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며 붕괴된다. 지금의 세계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광고하며 통제할 수 없는 외부를 은폐한다. 결국 <아사코 I&II>가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에 불신은 이 세계의 필요충분조건이며, 그 조건 하에서 사랑이라는 것 또한 불신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안에서 3.11를 통해 제시되는 재난 이후 파괴된 신뢰는 복구될 수 없다. 외부에서 무엇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세상인데, 사랑하는 대상을 온전히 믿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복구될 수 없는 신뢰를 계속 끌어 앉고 사느니, 불신을 믿음으로써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역설적인 설정은 포스트-재난의 세계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사코와 료헤이는 새로운 집에서 같은 강을 바라보며 “아름답다”와 “더럽다”는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여준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둘, 그 사이에는 신뢰가 붕괴되어 단절된 둘 사이의 거리감과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재가 존재한다. 사실 이러한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올해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의 엔딩에서, 나루미는 외계인에게 몸을 빼앗긴 남편 신지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신지가 그 개념을 가져가자 침략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루미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은 남아있지 않다. 영화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나루미와 신지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로 진행되는 숏-리버스 숏 구도를 보여주며 끝난다. 기요시 또한 <산책하는 침략자>를 통해 3.11 이후를 이야기하며, 그 이후의 사랑이란 분열되며 절대 쌍방일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재난 이후에도, 쌍방향의 신뢰가 사라진 이후에도 함께하겠다며 다짐하는 이들의 시선이 마주치지 못한 채 끝나는 두 영화는 포스트-재난 시대를 맞이한 현재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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