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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는 한 곳을 응시한다. 3분 동안 움직이지 않던 카메라는 풀밭인지,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를 곳으로 줌인 한다. 그 곳은 그저 어두운, 카메라 위에서 비치는 빛 덕분에 볼 수 있는 몇몇 풀벌레의 스쳐 지나감 말고는 볼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이다. 다시 3분 동안 그 곳을 응시하고, 쇼트가 바뀐다. 카메라는 다시 한 곳을 응시한다. 다시 몇 분 동안 풀밭을 응시하다가, 이번에는 줌아웃 한다. 풀밭에서 줌아웃 한 카메라에는 동굴의 입구가 잡힌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촬영되던 어두움은 동굴 안의 어두움이었으며, 후반부 동굴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동굴의 입구가 드러난다. 카메라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카메라 앞을 지나 동굴 밖으로 나가고, 카메라는 계속 동굴 입구를 비추다 영화가 끝난다.

 


 장은주 감독의 <안과 밖>은 동굴의 안과 밖을 양쪽에서 번갈아 촬영하며 카메라 앞뒤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지된 카메라는 응시하고 있는 대상과 카메라 뒤의 촬영자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카메라의 시선에 들어온 동굴의 입구는 동굴의 안과 밖을 가르는 또 하나의 경계가 된다. 때문에 풀밭에서 동굴의 안으로 줌인 하는 것은 촬영자-카메라-동굴 입구 사이의 두 경계를 과격하게 뒤튼다. 후반부의 줌아웃도 마찬가지다. <안과 밖>은 두 개의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뒤틀면서 영화적 체험을 실험한다. 풀밭 뒤에 숨겨진 어둠으로의 줌인은 그 속의 있을지 모를 무한한 공간을 상상케 하고, 동굴의 입구만을 프레임 내부에 두는 줌아웃은 외부의 빛을 통해서는 모두 알 수 없는 동굴 속 공간을 상상케 한다. 더욱이 카메라 뒤에서 걸어 나와 동굴 밖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통해 카메라 뒤의 공간을 인식하게 된다.


 


 <안과 밖>은 줌인/줌아웃을 통해 경계를 밀고 당기며 카메라와 카메라에 담긴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드러내는 영화적 체험이다. 평면의 스크린/디스플레이 속에서 무한한 공간을 인식하고 그 공간을 탐구하는 것은 초기 영화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차의 도착>을 보던 관객은 기차가 달려온 넓은 들판을 상상했고,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선 노동자들이 나오는 문 뒤의 보이지 않는 공장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크린의 평면을 넘어 카메라 앞에 담긴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영화의 기본적인 성질이다. <안과 밖>은 상상된 평면 위의 무한한 공간을 카메라 뒤의 공간으로까지 확장하고, 카메라의 앞과 뒤를 뒤섞으며 다시 한 번 확장한다. 이렇게 22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영화 속 공간의 확장성을 그야말로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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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트 블란쳇이 뮤지션, 노숙자, 과학자, 노동자, 주부,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교사 등의 모습으로 공산당 선언, 플럭서스, 다다이즘, 도그마 95, 팝아트 등에 대한 선언을 장례사, 식전 기도, 엘리베이터 안내, 프레젠테이션, 수업 등의 형태로 읊는다. 원래 미술관의 멀티채널 영상 설치 작업이었던 <매니페스토>는 편집을 거쳐 러닝타임 99분의 극장용 영화로 재탄생되었다. 선언이라는 의미의 제목처럼 현대 예술/미학에 대한 중요한 예술적 선언들을 다양한 모습의 사람이 다시 한번 선언한다. 선언에 대한 선언, 선언 그 자체를 예술로써 다루는 영화는 반예술적 기조의 선언들을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통해 시각화한다. 



 상당한 분량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선언에 대한 맥락과 내용을 파악하려면 두세 학기 정도의 수업이 필요할 지경이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매니페스토 중 공부했었던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숙자에 입으로 발화되는 공산당 선언에 대한 대사, 장례식에서 장례사로 등장하는 다다 선언, 초등학교 수업으로 등장하는 도그마 95 선언 등의 장면은 흥미로웠다. 각 매니페스토의 성격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영화 속에서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과 상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달까. 사전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인물들이 한 번에 스크린에 등장해 각각의 매니페스토를 읊는 것으로 끝난다. 매니페스토를 읊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마치 교향곡처럼 구성된다. 각기 다른 음조로 매니페스토를 읊으며 그것이 음악처럼 섞이는 마지막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현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매니페스토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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