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카렐'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앵커맨>, <스텝 브라더스> 등의 코미디 영화에서 <빅 쇼트>를 통해 블랙코미디를 시도했던 아담 맥케이 감독이 조지 W. 부시 시절의 부통령 딕 체니를 다룬 영화 <바이스>로 돌아왔다. <바이스>는 전작과 유사한 전략을 취한다. 화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딕 체니(크리스탄 베일)의 일생이 전개되고, 린 체니(에이미 아담스), 조지 W. 부시(샘 록웰),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카렐) 등의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종종 광범위한 대중문화의 인용과 실제 뉴스 푸티지에 배우들을 합성한 영상, 심지어 페이크 엔드크레딧도 등장하고, <빅 쇼트>에서처럼 제4의 벽을 부수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도 등장한다. 

 때문에 <바이스>는 종종 마이클 무어의 영화 작법을 극영화에 적용한 것만 같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마이클 무어 본인이 대상에 저돌적으로 돌진하며 수많은 의혹과 팩트를 뒤섞고, 대중문화를 폭넓게 인용하며 설명을 도우며 형성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의 형식을 띤다. <바이스>도 유사하다. “우리도 존나 열심히 만들긴 했습니다”라는 오프닝의 자막과 함께 시작되어 영화 내내 쏟아지는 정보들은 132분의 러닝타임 동안 모두 소화해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미국 보수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딕 체니에게 보내는 조소가 종종 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라크 전쟁과 ISIS탄생의 원흉인 딕 체니를 비판한다는 중심점은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낱낱이 풀어낸다고 하기엔, 극 중 딕 체니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진짜인 것처럼 사용한 것처럼, 영화 또한 확정적이지 않은 정보를 극에 도입한다는 인상을 준다. 자신만만한 척하며 관객에게 블러핑을 시도하는 오프닝 자막과 더불어, 극의 화자인 커트(제시 플레먼트)가 극에서 벗어난 전지적 시점의 인물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의심을 품게 한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팩트로 승부하자!”라는 구호는 보수집단의 구호처럼 여겨진다. <바이스>는 “그렇다면 팩트로 승부해줄게!”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하지만 어딘가 완벽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오미 왓츠가 카메오 출연한 폭스 뉴스 영상이나 배우들이 합성된 과거 뉴스 영상 등은 영화 스스로가 정보들을 조직하는 방식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결점으로 작용한다. 여러 시간대를 겹치는 교차편집들은 많은 시간과 인물이 엮여 있다는 ‘익숙한’ 사실을 너무나도 비장하게 전달하며 피로감을 준다. 이라크나 캄보디아 폭격 장면을 묘사한 장면은 “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오로지 딕 체니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어 아쉽기만 하다. 딕 체니를 중심으로 삼았지만 너무 많은 가지로 뻗어 나가는 영화는 결국 <화씨 9/11>, <제로 다크 서티>,  등 해당 시기를 다룬 여러 영화들을 엮어 놓은 인상에 그치고 만다. 오프닝의 자막대로 “존나 열심히 만들었”지만, 잘 정리한 것 이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한다. <바이스>는 이 이야기에 이러한 화법에서 마이클 무어를 능가할 수 없다는 반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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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신장운동의 바람이 불던 1973년, 여성 테니스 1위인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은 남성 선수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여성 토너먼트의 상금에 불만을 가진다. 이에 기존의 열리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여성 선수들만의 토너먼트를 이어간다. 남성 중심의 스포츠 업계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빌리 진 킹과 여성테니스협회는 스폰서의 협찬까지 따내면서 나름 성공적으로 투어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빌리의 이러한 행보를 주목하던 왕년의 챔피언이자 도박을 즐기는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가 그녀에게 10만 달러의 상금을 건 경기를 제안한다. 평범한 회사원의 생활에 무료함을 느낀 바비는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이러한 판을 벌인다. 빌리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고 세기의 빅 매치를 준비한다.



 <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은 1973년에 있었던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기의 성대결>(Battle of Sexes)라는 원제처럼 영화는 121분의 러닝타임 내내 테니스계, 스포츠계,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깔린 “남성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때문에 스포츠, 정치, 가정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인식에 맞선 빌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는 테니스협회 회장인 잭 크레이머(빌 풀먼)이나 바비 릭스의 노골적인 여성 비하 발언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이를 끊임없이 되받아 치는 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기의 대결을 준비하며 훈련하고 고민하는 빌리의 모습과 특유의 쇼맨십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휘어잡는데 집중하는 바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차편집에서 이미 테니스 공을 주고받는 랠리가 시작된 것만 같다. 기대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연출된 테니스 경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치 빌리와 바비의 경기가 열린 돔 경기장에 앉아있는 관중이 된 것처럼 1973년 당시의 열기와 흥분이 느껴진다.



 영화에는 분명 아쉬움도 존재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전개와 좁은 공간 속에 모인 사람들을 훑는 핸드헬드 촬영은 산만하게 느껴지고, 바비 릭스의 비중은 단순히 빌리 진 킹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러닝메이트 수준보다 조금 과하게 많아 보인다. 후반부 바비가 아내인 프리실라(엘리자베스 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이나, 오만한 모습을 전시하는듯한 장면들은 이따금씩 빌리에게서 정말로 스포트라이트를 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행히도 <빌리 진 킹>은 중심을 놓치지는 않는데, 이는 배우들의 공이 크다. 엠마 스톤은 <라라랜드>가 아닌 이 영화로 오스카를 받았다 해도 놀랍지 않을 연기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다 내가 살면서 겪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 감정이 연기를 통해 전달되고 관객인 나 역시 그러한 감정 속으로 들어갈 때 놀라곤 한다. <빌리 진 킹>의 엠마 스톤은 그러한 순간을 몇 차례고 만들어낸다. 바비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은 수다스러우며 오만한 캐릭터 그 자체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슈, 사라 실버맨, 알란 커밍 등의 연기 역시 영화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빌리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 마릴린 역의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와 남편 래리 킹 역의 오스틴 스토웰은 영화에 안정감을 더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빌리의 고민을 담은 마릴린과 조신하게 내조하는 래리의 캐릭터는 빌리의 이야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영화를 보며 <히든 피겨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성차별과 맞서는 천재들.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유리천장을 부수고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 주변의 여성들과 연대해 어떤 흐름을 만들어가는 여성들. 물론 두 영화 모두 어떤 분야의 천재이기에 유리천장을 깰 수 있었다는 서사로 귀결된다는 점이나, 인종적/계급적 함의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빌리 진 킹>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이인 테이(알란 커밍)와 클로짓 레즈비언인 빌리 사이의 연대가 드러나는 부분은 좋았다)은 아쉽다. 그러나 나사의 컴퓨터로 불리는 여성 직원들을 모아 복도를 행진하는 <히든 피겨스>의 천재들이나, 단숨에 테니스협회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기어이 성공시키는 빌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모델이 된다. <고스트 버스터즈>나 <원더우먼>과 같은 픽션 속 여성 영웅과 더불어 현실 속 여성 영웅들이 계속해서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흐름이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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