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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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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북촌방향>과 <다른나라에서>를 시작으로 영화 속 시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온 홍상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이야기 자체의 변화까지 보여줬다. 그러한 변화는 홍상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홍상수 본인을 포함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영화 속 찌질한 남성들의 구애를 받아내는 위치였던 영화 속 여성에게 솔직함을 드러내고(<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들을 존대하기 시작했다(<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현실 속 여러 논란과 겹치는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다른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있지만) 홍상수 영화의 첫 여성 원 톱 주연 영화이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느껴진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밤의 해변에서의 혼자>의 주인공 영희(김민희)는 영화 내외적으로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아닌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조금씩 보여오던 변화가 비로소 완성되고, 새로운 단계의 홍상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손글씨 오프닝 크레딧을 버리면서 시작한다. 타자기로 적당히 친 것 같은 폰트의 오프닝 크레딧은 그의 전작들을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영화의 문을 연다. 2부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영희와 지영(서영화)이 함부르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영희는 함부르크로 찾아올지 아닌지도 모를 불륜관계에 있던 영화감독이자 유부남 상원(문성근)을 기다린다. 영희는 공원에 있는 다리를 건너기 전,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그의 소원은 상원이 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앞길을 바라는 소원이다. 2부에서는 영희가 준희(송선미)를 만나기 위해 강릉을 찾고, 선배인 천우(권해효)와 명수(정재영) 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천우, 명수, 준희, 명수의 애인인 도희(박예주)와 함께 하는 술자리와, 우연히 만나게 된 조감독 승희(안재홍)를 통해 만난 상원과 영화 스태프들과의 술자리, 총 두 번의 술자리가 등장한다. 사랑, 관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영희의 대사는, 때로는 현실의 논란이 생각나 실소가 터지기도 하지만, 자리의 다른 인물들을 찍어 누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자기파괴적인 영화이다. 2부의 세 남자 상원, 천우, 명수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배우들을 기용하고,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다시 소환해낸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술자리 장면에서 괴력의 연기를 선보이는 김민희의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대사로, 표정으로 찍어 누르고 압도하며 영화를 장악해나간다. 다시 말하자면,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영화 속에서 부수어버린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김민희의 연기를 빌어 파괴한다. 손글씨를 버린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원경에서 인물을 잡은 쇼트나 풍경을 잡은 쇼트 등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을 탐구해온 작가는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영화 속에 반영시켰고, 이번 영화를 통해 (그리고 현실의 사건을 빌어) 자신을 파괴한 뒤, 그 내면을 영화로 담아낸다. 김민희의 몸을 빌어 진행되는 홍상수의 자기파괴는 김민희에겐 자기 반영으로 느껴진다.



 1부와 2부엔 각각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등장한다. 1부의 남자는 공원에서 난데없이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묻는다. 모른다는 둘에게 “핸드폰 그런 것도 없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남자는 해변에서 김민희를 둘러업고 저 멀리 달려간다. 2부의 남자는 영희의 숙소 베란다 창문을 닦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방에 있는 영희, 준희, 천우 모두 남자의 존재를 그가 마치 유령인 것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남자는 창문을 닦지만, 깨끗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더럽기만 하다. 어느샌가 그는 닦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이 남자는 홍상수가 영화 속에 등장한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준다. 누군가의 시간 안에 들어오고, 그를 데려가며, 투명해지려 계속 창을 닦지만 깨끗해지지 못하는 사람. 자기파괴적인 그의 영화에 등장한 (그의 영화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캐릭터는 그의 분신으로써 영화에 끼어든다. 이야기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유령으로써 영화 안에 등장하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까지 조금씩 변화를 보이던 그의 영화가 만든 하나의 결과물이다. 현실과 영화가 뒤섞인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의 신작은,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영화 세계의 새 단계를 연다.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초기작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만든 영화가 아닐까? 이자벨 위페르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고, 그의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 정진영, 어김없이 다시 출연하는 김민희가 뭉친 홍상수의 차기작 <클레어의 카메라>가 기대된다.6/220967125879

<춘천, 춘천>에 이어 장우진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춘천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겉으로 보이는 틀은 전작과 유사하다. 영화는 춘천을 배경으로 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 20대 청년 커플인 군인(우지현)과 여자(이상희)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흥주와 은주는 20여 년 만에 청평사를 찾는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은주는 핸드폰을 두고 왔음을 기억해낸다.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간 둘은 청평호를 건너는 배가 끊기는 바람에 그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같은 시간, 젊은 군인과 여자는 청평사를 돌아다니다 배 시간이 끊겼음을 알게 된다. 청평사에서의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기묘한 만남과 대화가 <겨울밤에>의 이야기다. 



중년과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 안에서 순환한다는 구조는 같지만, 그들이 직접 대면하지 않았던 <춘천, 춘천>과는 달리 <겨울밤에>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서로 만나게 된다. 두 커플의 시간선, 거기에 흥주와 은주의 시간선이 분열되며 영화 속에 여러 개의 시간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언뜻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들은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이 공유하는 유사한 상황을 통해 순환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은 흥주가 보게 되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이나, 폭포 밑 얼음에서의 위험천만한 상황 등을 통해 분열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은주는 얼음에서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군인과 여자를 만나며 위험을 모면하고 그들과 대화한다. 흥주와 함께하는 시간선에서 분열되어 나온 은주는 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커플을 응시하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다시 봉합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반면 흥주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을 쫓아간다. 그는 핸드폰을 두고 온 은주를 탓하면서 자신도 장갑을 땅바닥에 두고 온다. 첫사랑 또한 유령처럼 등장하여 유령처럼 사라진다. 흥주의 분열은 봉합으로 향하지 못하고, 잃어버림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프닝과 유사하다.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택시기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흥주와 은주를 청평사 밖으로 실어 나른다. 갑자기 내려달라는 은주의 말에 흥주도 따라 내리고, 잠시 멈춘 택시 앞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누군가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다른 상황에서, 마지막의 마주 보기는 불완전한 봉합으로 마무리된다. 산장의 방에서 흥주와 은주가 함께 앉아있던 방에 비치는 열풍기의 붉은빛은 절대 두 사람 모두를 한 번에 비추지 못한다. 그들을 한 번에 비추지 못하는 경고등 같은 온풍기의 빛이나 겨울의 달빛은 진작의 둘의 봉합 불가능성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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