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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누가 캡틴 알렉스를 죽였나>가 전 세계에 배급되면서 화려하게 이름을 알린 나브와나 I.G.G. 감독이 <배드 블랙>으로 돌아왔다! 카체이싱, 무협, 액션과 CG 장면까지 써가며 각종 장르를 맥락 없이 넘나 든다. 묘한 쾌감과 웃음을 선사하는 근본을 찾기 힘든 코믹 잡종 액션 영화.” 이번 부천국체판타스틱영화제는 우간다에서 날아온 영화 <배드 블랙>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화제가 아닌 <배드 블랙>의 제작자 겸 배우 알란 호프마니스가 주최한 게릴라 상영회를 통해 <배드 블랙>을 비롯한 우간다 와카리우드의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에 엮인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간다에는 내전이 끝난 80년대가 돼서야 음악과 영화 등의 대중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여러 부족이 있기에 50여 개에 달하는 언어와 부족한 영사기술 때문에 <람보>, <코만도>, <터미네이터> 등의 영화에 자막을 입히지 못한 채로 상태로 상영하게 되었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장 클로드 반담, 척 노리스 등이 출연한 하드보디 액션 영화와 B급 슬레셔 호러 영화 등이었다. 자막을 영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VJ(VideoJoker)라는 영화 해설사가 영화를 상영하면서 해설해주었다. 그 역시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설명은 언제나 이상해졌고 코미디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VJ는 한국의 변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변사는 각본을 다시 연기하면서 영화를 설명해주는 역할이었다면, VJ는 영화에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대사와는 전혀 별개인 이야기를 추가하기도 한다. 그렇게 각 지역만의 상영이 이어지다 몇몇 마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우간다에서 인기 있었던 액션과 호러 장르의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VJ의 영향으로 코미디가 뒤섞이게 되었다. <배드 블랙>을 보면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레이션이 나와 "슈퍼 드라이브!", "우간다 슈워제네거!" 등의 추임새를 넣어주는데 VJ가 영화를 해설하던 형식이 고스란히 영화의 형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배드 블랙>을 만들어낸 와카리우드는 우간다의 와칼리가라는 마을 이름과 할리우드의 이름을 합성한 말이다. 그들은 할리우드, 발리우드는 한 국가의 영화산업이지만 와카리우드는 자기 마을의 영화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와카리우드의 영화들은 작은 와칼리가의 마을에서 모두 촬영된다. 카체이싱은 몇 미터 되지 않는 작은 도로에서 카메라 트릭을 이용해 완성했고,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와칼리가의 주민들이다. 130명 남짓한 마을의 주민들이 연출, 연기, 각본, 촬영, 소품, 편집, 특수효과, 스턴트 등을 모두 담당하는 셈이다. 자동차 부품이나 파이프 등을 이용해 총을 비롯한 각종 소품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색칠해 탄피처럼 꾸미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것이 실제 영화에서 꽤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을 보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심지어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인터넷조차 온전하지 못한 곳이다. 그들은 영화를 편집하고 VFX를 넣기 위해 부품을 모아 컴퓨터를 직접 제작하고, 편집과 VFX 프로그램을 구해와 (인터넷이 없으니 유투브 등에서 프로그램을 학습할 수가 없다) 프로그램 툴을 하나하나 조작해보며 익힌 실력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와카리우드 영화는는마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 사람들의 영화가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액션 영화, 호러영화를 뒤섞어 또 다른 창작물을 내놓는 열정과 즐거움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마치 마을 전체가 미셸 공드리의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VJ라는 형식이 영화 속에 녹아있는 것은 <배드 블랙>을비롯한 와카리우드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한국의 변사는 영화를 관람하는 형식이지 영화의 형식으로 녹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VJ는 영화의 형식으로써 영화 속에 포함되어 있고, 영화의 활력과 재미를 담당한다. 앞서 설명한 우간다의 영화 상영 역사를 영화 형식으로 녹여낸 것이기도 해, 우간다의 영화사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생각보다 깔끔한 촬영과 좋은 합을 선보이는 액션, 당장 세계 장르영화에 투입시켜도 어색하지 않은 몇몇 고어 장면의 특수효과 역시 와카리우드 영화의 큰 재미이지만, VJ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화의 형식은 영화의 가치를 수직상승시킨다. 한 마을의, 한 나라의 영화 상영 역사가 고스란히 영화의 형식이 되어버린 것을 알면 <배드 블랙>이라는 영화가 가진 가치의 겹이 늘어난다. 때문에 <배드 블랙>과 와카리우드의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올해의 발견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제에 초청된 와카리우드 사람들의 인사 영상을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AthYlugx6M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통해 처음 소개된 김진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두천>은 러닝타임 12분의 VR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VR 체험 섹션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시간을 내어 감상했다. 동두천의 기지촌 여성들을 담은 작품이다. VR기기를 착용하면 동두천 기지촌을 촬영한 작품이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동두천의 어느 편의점 앞, 골목길 사이, 어느 여관방 등의 영상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제자리에 고정된 채 주변의 사람들을 담아낸다. VR기기를 착용한 관객은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면서 동두천 기지촌 인근 거리와 그곳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부터 이런저런 행인, 바에서 나오는 군복 입은 미군 등 여러 남성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몇 개의 장면이 이어지는데, 장면의 시작점이 편의점 입구의 정면이나 건물의 외벽 등을 향하고 있어 관객은 필연적으로 고개를 돌려 거리를 구석구석 돌아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공간인 여관방에서 관객의 시야에 처음 들어오는 것은 벽에 걸려있는 선풍기이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맞이하게 되는 충격적인 장면은 VR이라는 매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극영화에서의 VR 활용에서는 의문점이 많이 남았었다. 게임이나 인터랙티브 시네마가 아닌 일반 극영화에 VR에 영화적 서사를 입힐 수 있을까 하는 것은 VR이 상용화된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다. VR영화는 아니었지만 이에 가까운 형식을 가진 액션 영화 <하드코어 헨리>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내며 영화적 쾌감을 반감시켰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VR의 활용은 일반 스크린이나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적극적인 체험과 인식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두천>과 같은 형식의 영화를 한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서사 속에서 편집점을 잡기 어려운 극영화에 비해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VR 다큐멘터리의 경우 장면 편집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활용도가 높아 보인다.



 <동두천>의 이야기는 1992년 미군에 의해 살해된 여성 성노동자를 다룬다. <동두천>이 어떤 이야기를, 서사를 그린다고 말할 때, 그 방식에 있어서 기존의 영화적이라고 불리는 방법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동두천>이 VR을 통해 얻는 영화적 효과는 기존 극장 스크린에서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을 목격하는 효과보단 멀티채널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전시 영화가 주는 효과와 유사하다. 영상 자체에 압도되는 것은 아니지만, 두리번거리기를 통해 장소 자체를 체감하고, 사건 당사자의 행적을 뒤쫓아간다. 다소 선정적일 수도 있는 소재지만 <동두천>은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작품은 아니다. 차분할 정도로 천천히, 고요하게 사건을 따라가는 영화는 기치촌 거리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공포와 긴장감과 같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다. 세심하게 만들어진 영상은 VR이라는 매체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다큐멘터리 장르의 VR 활용의 가능성과 미래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동두천>은 독특하고 특별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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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쥐스틴(가렌스 마릴러)의 가족은 채식주의자이다. 뷔페식 식당의 고기 메뉴들을 쭉 지나쳐 매쉬드 포테이토만 받아가는 쥐스틴과, 그 속에 섞여있는 고기 한 조각에 불같이 화를 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시작된다. 쥐스틴은 친언니인 알렉스(엘라 룸프)가 다니는 대학 수의학과에 입학한다. 혹독한 신고식으로 유명한 수의학과에서 신입생들은 영화 <캐리>처럼 동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억지로 동물의 내장을 먹어야 한다. 채식주의자인 쥐스틴은 이를 거부하지만 알렉스는 그의 입에 토끼의 생 간을 집어넣는다. 신고식 이후 육식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쥐스틴은 식당에서 몰래 고기를 가져오기도 하고, 냉장고 속 룸메이트의 식재료를 날 것으로 집어먹기도 한다. 그러던 중 사고로 알렉스의 손가락이 잘리고, 쥐스틴은 충동적으로 그 손가락을 먹는다. 쥐스틴은 이제 인육에 대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한다.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를 영화가 다루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채식주의자가 식인을 하게 된다는 설정은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다. 그러나 파격적인 내용에 비해서 영화의 고어 수위는 높지 않은 편이다. 식인 장면이 나올 만큼은 나오지만 내장 파티를 벌이는 순대곱창류의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속 식인은 인물의 충동을 통해서 드러나며, 이것은 섹슈얼리티 혹은 폭력에 대한 은유로 작동한다. 집을 벗어나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이 겪는 폭력적인 신고식을 비롯한 위계질서, 수많은 파티와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섹슈얼리티 등은 쥐스틴이 겪는 다양한 충동으로 발현된다. 영화 속 식인은 사람을 향한 폭력이자 식욕/성욕/지배욕 등이 뒤섞인 욕망이다. 그렇기에 <로우>에서의 식인은 날 것의 세상에 떨어진 쥐스틴이 겪는 성장통으로 존재한다. 쥐스틴의 식인 충동은 억눌러진 욕망에 발현이자 야생의 세계가 가하는 폭력에 대한 대응이다. 대학의 교수들은 학생들이 피를 뒤집어쓴 채 수업에 나타나도 놀라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수업을 진행한다. 폭력적 위계질서에 쥐스틴이 자그마한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언니인 알렉스가 선배로 있기 때문일 뿐이다. 모두가 방관자이자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사회적 폭력 속에서 쥐스틴의 식인은 꽤나 소극적인 방식의 대항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쥐스틴이 학교에 도착한 첫날밤부터 몰아치는 강압과 폭력, 그리고 방관은 카니발리즘보다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강렬한 소재인 만큼 쥐스틴이 겪는 충동과 감정 역시 강렬하게 다가온다. 엔딩에서 밝혀지는 어떤 비밀은 이러한 충동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쥐스틴의 선택이라기 보단 모태신앙처럼 부모에 의해 선택된 채식은 그를 억업하는 장치였고, 쥐스틴보다 먼저 대학으로 떠나 부모로부터 해방된 알렉스는 일찍이 억압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때문에 알렉스는 부모와 연락도 하지 않고, 쥐스틴이 부모와 함께 학교에 도착했을 때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쥐스틴은 소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풀어낸다. 쥐스틴은 스스로 파티를 찾아가기보다 파티에 던져지는 사람이고, 고기에 대한 욕구는 급식소의 음식을 몰래 주머니에 담는 것으로 표출하며, 사냥하듯 자동차 사고가 나도록 유도하고 죽어가는 운전자를 먹는 알렉스(알렉스 역시 식인을 한다)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알렉스는 적극적으로 파티를 찾아다니고, 위계질서와 사회적 폭력에 적응하고 체화하여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낸다. 알렉스는 쥐스틴의 대척점이자 혹시 모를 미래로써 존재하고, 그렇기에 둘의 자매애는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깊은 감정을 자아낸다.



 <로우>는 카니발리즘을 소재 삼은 성장영화이자, 폭력적 위계질서를 고발하는 영화이며, 그 속에 던져진 한 개인을 관찰하는 작품이다. 고어에 집중하는 관객에겐 실망스러운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집에서 벗어나 날 것의 세상에 던져진 한 사람의 다양한 결을 담아낸 영화는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가렌스 마릴러와 엘라 룸프의 뛰어난 연기, 롱테이크부터 자잘한 쇼트 분할까지 넘나드는 유려한 촬영,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음악까지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로우>는많은 사람에게 올해 가장 미친 영화로 기억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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