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하고 정리가 안 되어 이번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상영을 통해 재관람했다. 영화의 설정은 단순하다. <신체강탈자의 침입>처럼 외계인들이 어느 인간들의 몸을 빼앗아 지구를 침략할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침략 대상인 인간들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개념을 모으는 것이다. 침략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미지화된 개념을 빼앗는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소유, 가족, 일, 자신, 타인 등의 개념이 사라지고 언어화되어 흩어졌기에 모두 백지화하고 개념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침략자인 신지나 아마노는 개념을 빼앗긴 인간들을 보고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인간들이 지니고 사는 개념들은 온갖 언어에 의해 해체되었고 변질되었다. 언어로써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을 이미지로 떠올렸을 때 침략자들은 개념을 약탈해간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그제야 비로소 언어로서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결국 침략이 시작된다. 나루미는 신지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 달라고 이야기한다. 신지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략은 멈춘다. 영화는 그로부터 두 달 뒤, 침략 이후 재건되는 어느 마을에서 마무리된다. 신지는 나루미가 입원한 병실을 찾는다. 앉아있는 둘은 서로 시선이 엇갈리게 앉아있다. 침략자들은 인간은 가질 수 없던 개념, 특히 사랑이라는 개념을 꽤나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한다(혹은 그런 것으로 보인다). 언어를 통해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개념을 인간들은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유독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그렇지 못하다. 신지와 나루미의 엇갈린 시선은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의사는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을 것이라 말하지만 엇갈린 시선은 그 가능성마저 무시하는 것 같다. 어쩌면 <산책하는 침략자>의 결말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우주전쟁>의 따뜻한 가족주의처럼 느껴질 여지도 있다. 그러나 나루미와 신지의 시선은 냉소적으로 그 가능성을 비웃는 기요시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스포일러 포함


 어떤 외딴 지역에 있는 집, 한 여성(제니퍼 로렌스)은 남편(하비에르 바르뎀)과 함께 살고 있다. 여성은 화재로 타버렸던 집을 홀로 수리하고, 시인인 남편은 자신의 작업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한 남자(에드 해리스)가 찾아온다. 그 집이 민박인 줄 알고 찾아왔다는 그는 남편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임을 알아차린다. 하룻밤 사이에 남편과 남자는 친밀해지고, 여성은 자신의 집에 낯선 사람을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다음날, 갑자기 찾아온 남자의 아내(미셸 파이퍼)가 찾아온다. 무례하고 제멋대로 구는 그녀에 이어 남자와 아내의 두 아들(돔놀 글리슨, 브라이언 글리슨)이 찾아와 남자의 유언장을 놓고 몸싸움을 벌이다 첫째가 둘째를 죽이고 만다. 두 시간 후 조문객이 잔뜩 몰려오고 남편은 그들을 집의 손님으로 받아주지만 여성은 이에 혼란스러워한다. 집에 점점 불청객이 늘어만 가고, 갈수록 혼란해져만 간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작 <마더!>는 영화 내내 불길함을 조성한다. 자꾸만 약을 먹는 제니퍼 로렌스(극 중 인물의 이름이 지칭되지 않기에 그냥 배우 이름으로 부른다)는 이명과도 같은 소리를 들으며 어지러워하고, 집의 심장과도 같은 환영을 본다. 남편인 하비에르 바르뎀은 집에 갑작스레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은 집안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친절하고, 그들을 쉽게 믿는다. 갑자기 찾아온 남자 에드 해리스와 여자 미셸 파이퍼는 그 집이 자신들의 집인 양 그곳을 헤집고 다니고, 결국 아무도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하비에르의 서재에 들어가 그가 아끼는 크리스털을 깨고 만다. 에드와 미셸의 두 아들은 각자의 질투심에 몸싸움을 벌인다.



 <마더!>가 지닌 상징들은 굳이 열거하기 유치할 정도로 명징하다. 은유가 아닌 직유에 가까운 상징들은 신,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방주, 출애굽, 예수, 동방박사, 계시록 등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종교적인 상징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이 영화는 인류애를 상실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지독하게 염세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키는 조문객들의 행렬은 무질서하고 문란하며 신에 대한 복종과 섬김보다는 파괴를 일삼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니퍼와 하비에르는 싱크대가 부서져 한바탕 물난리가 난 이후에나 둘만 남게 되고, 성기능 불구처럼 그려졌던 하비에르는 그제야 제니퍼와 섹스를 나눈다. 인간이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뱃속의 아이를 기다리던 제니퍼는 하비에르가 그녀에게서 영감 받아 쓴 시를 완성하면서 다시 불길함에 휩싸인다. 그의 시가 출간되자 그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집에 들이닥치고, 전반부의 조문객들 보다 더욱 끔찍한 난장판을 벌이기 때문이다. 하비에르의 시를 찬양하던 사람들은 이내 그의 모든 몸짓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숭배한다. 모든지 나누겠다는 그의 말에 따라 집의 집기를 훔치고 벽을 뜯어가기도 한다. 난장판을 통제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은 사람들의 반감만 사고, 집 안에서 폭동이 벌어지며 화염병이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군인들은 집 안에서 전투를 벌이고, 어느샌가 지어진 철조망 안에 갇힌사람들은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된다. 자본가(출판사 사람-크리스틴 위그)가 그들을 처형하는 장면은 ISIS와 같은 테러조직의 처형 영상을 연상시킨다. 난장판을 뚫고 제니퍼는 하비에르의 서재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조용히 선물만을 보낸다. 아이를 낳은 지 3일째 되는 날 하비에르는 사람들에게 아이를 보여주겠다고 데리고 나가지만, 광신적인 사람들은 아이를 죽이고 구워 뜯어먹는다. 분노한 제니퍼는 지하실 보일러에 든 기름에 불을 붙이고 자폭한다.



 영화는 하비에르가 불에 타 죽어가는 제니퍼의 심장을 꺼내고, 그것의 재를 터니 선악과처럼 그려진 크리스털이 등장하며, 그 크리스털을 다시 진열하니 잿더미가 된 집이 다시 복구되고 오프닝과 유사한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신은 물로써 인간을 한 번 쓸어버렸고, 불로써 다시 한번 인간을 쓸어버렸다. 영화 속에서 신으로 지칭(직접적으로 지칭되진 않지만 너무나도 명징한 상징이기에)되는 하비에르가 직접 물과 불로 인간을 쓸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집안에 풀어놓은 인간들은 정해진 수순을 밟듯 온갖 혼란과 난장판을 벌이는 것을 자처한다. 인구과밀, 테러, 전쟁, 폭력진압, 광신, 문란한 관계…… <마더!>의 난장판을 보고 있자면 대런 아로노프스키 자신이 하비에르의 위치, 신의 위치에 서서 자신이 인간을 혐오하고 극도로 염세적이게 되어 버린 이유를 열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 러닝타임의 절반 정도를 제니퍼 로렌스의 얼굴과 뒤통수의 클로즈업을 채운 이 영화는 제니퍼와 하비에르의 집 공간의 스케치를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은 제니퍼에게 몰입하고 그녀의 시선으로 자신의 집이 파괴되는 혼돈의 현상을 보게 된다. 하비에르가 신이고 에드와 미셸이 아담과 이브이기에 제니퍼는 당연히 집, 지구, 에덴동산, 땅, 가이아 등등의 것이다. 아로노프스키의 카메라는 제니퍼의 시선을 따라가며 집/지구/에덴과 동일시된 그녀가 착취당하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전시한다.



 결국 <마더!>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의미를 남기는 작업이라기보단, 대런 아로노프스 본인이 성경을 비롯한 종교적 상징에 근거하여 자신의 지독한 염세주의를 전시하는 작업이다. 너무나도 명징하게 성경 속 상징들을 가져왔기에 영화의 많은 이야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고, 이러한 상징들을 해석한다는 행위는 유치해지기까지 한다. 제목은 또왜 <마더!>일까? 영화 속 제니퍼는 가사노동에, 손님 접대에, 임신과 출산에(이것은 제니퍼 스스로가 바라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는 하비에르에 손에 들려 갔으므로), 폭력에 착취당한다. 'MotherEarth’라는 이름 하에 모성, 어머니됨을 영화의 제목으로 내세운 것은 어떠한 전복도, 전위도 아닌 얕은 상징들뿐이다. 아로노프스키는 이러한 상징의 이미지들을 대단한 전복적 이미지들이라 생각하는 듯이 스크린에 전시한다. 아로노프스키의 이미지 포르노그래피랄까? 때문에 <마더!>는입이 험악한 종교인이 육두문자를 잔뜩 섞고 남의 얼굴에 침을 튀겨 가면서 성경을 설교해주는 것만 같다. 그가 지독한 무신론자라는 사실이 영화보다 더욱 염세적으로 보일 뿐이다.


<도쿄 흡혈 호텔>은 소노 시온 감독이 아마존 프라임과 손 잡고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를 144분짜리 영화판으로 재편집한 작품이다. <두더지> 이후 엄청난 다작을 선보이는 소노 시온이지만 <안티포르노>와 <지옥이 뭐가 나빠> 정도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최악을 넘어 또 다른 최악을 선보이는 감독이었다. <도쿄 흡혈 호텔>은 점점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소노 시온 감독의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그나마 몇몇 희망을 보았던 순간들 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소노 시온 특유의 원색 가득한 세트와 미술은 조잡해 보이기만 하고, 루마니아 로케이션은 모든 부분이 불필요해 보이며, 두 뱀파이어 종족 사이의 대결은 이게 대결인지 각자도생인지 그 목적이 뭔지 불분명하다. 오프닝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뱀파이어들이 마나미(토미테 아미)를 노린 이유는 영화 중반부가 지나자 이야기 밖으로 버려지고, 인과관계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와 인간과의 난장판 싸움의 클라이맥스로 영화가 치닫는다. 오프닝에서 엔딩까지 영화가 제시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묶이기는커녕 서로가 서로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9부작 드라마를 한 편의 영화로 편집했다고 해도 튀는 편집들과 오락가락 하는 캐릭터의 성격들은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도록 정신을 흐린다. 드라큘라 가문의 K(카호)와 코르빈 가문의 야마다(마츠시마 신노스케)가 왜 싸우는지, 왜 싸우다 마는지, 마나미를 놓고 그렇게 쟁탈전을 벌이던 둘은 왜 마나미를 내팽개치고 각자 이야기를 풀어가는지…… 뻔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것은 영화감독으로서, 특히 장르영화감독으로서 중요한 덕목이다. <자살클럽>, <러브 익스포저>, <두더지>, <지옥이 뭐가 나빠> 등의 영화에서 소노 시온 영화는 이러한 덕목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도쿄 흡혈 호텔>은 그저 뻔뻔하기만 하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엉망진창인 <도쿄 흡혈 호텔>을 보며 소노 시온의 뻔뻔함은 이제 덕목이 아닌 철면피의 단계로 가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스포일러 포함


 과학도인 재연(문근영)은 엽록소를 활용한 인공혈액 녹혈구를 연구하고 있다. 재연은 아내와 사별한 정 교수(서태화)와 사랑을 나누며 연구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후배인 수희(박지수)에게 자신의 연구를 도둑맞고 정 교수마저 빼앗기고 만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재연은 어릴 적에 자랐던 숲 속의 유리정원에 들어간다. 한편 첫 소설을 발표했지만 흥행에 실패한 소설가 지훈(김태훈)은 슬럼프를 겪고 있다. 그는 우연히 재연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재연의 연구를 자신의 새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결과물에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것을 훔친다. 과학도의 이야기로 시작해 소설가의 이야기로 끝나는 <유리정원>의 이야기는 잔혹한 판타지에 가깝다. 영화는 “순수한 것은 오염되기 쉽죠”라는 재연의 말처럼 등장인물들의 순수했던 첫 의도는 모두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고 공격하는 현실을 담아낸다.



 문제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서로를 착취할 뿐만 아니라 영화마저 캐릭터를 착취한다는 점이다. 재연은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왼쪽 다리가 자라다 만 상태이고, 때문에 항상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다닌다. 지훈 역시 선천적인 문제로 몸의 왼쪽에 점점 마비가 온다. 연구결과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고, 대문호의 작품이 표절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출판계에서 내쫓긴 두 사람에게 신체적인 결함마저 주어진다. 신수원 감독은 고난에 고난이 겹친 상황 속에 인물을 놓아두고, 이러한 인물들이 자신의 꿈 혹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열정을 순수하다고 여기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함을 더럽히는 것이, 오염시키는 것이 <유리정원>의 목표이다. 종종 부감으로 인물과 유리정원 등을 내려다보는 영화의 시선은 절대자의 위치에서 캐릭터들을 고난 속에 밀어 넣고 관찰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장애를 가진 여성에게 자신의 다리를 낫게 하겠다는 순수한 열망을 심어주었다가 그것을 앗아가고, 좁은 유리정원에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 뒤 결국 땅에 뿌리내린 나무가 되게 만드는 서사, 그리고 남성 소설가인 지훈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다는 이유로 재연에게 접근하고 스스로를 유리정원 안에 가두고 결국 나무가 되어 땅에 뿌리 박혀 버린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팔아 성공한다. 그가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 ‘유리정원’ 때문에 좁은 유리정원 안에 숨어 지내던 재연의 마지막 남은 삶까지도 파괴당한다.



 결국 <유리정원>은 세상의 착취를 피해 유리정원 안으로 숨어든 순수한 여성이 다시 한번 남성 소설가인 지훈에 의해 착취당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되는 이야기이다. 지훈은 착취의 결과물로 외적인 성공을 얻지만, 재연은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살리는 것에도 실패하고 유리정원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 것도 모자라 움직일 수 없는 나무가 된다. 여성, 그것도 문근영이라는 배우를 순수성의 상징으로 캐스팅하는 진부함도 모자라, 결과적으로 재연을 주인공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남성의 뮤즈로써 존재하는 인물로 남겨둔다. 영화는 재연 스스로가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말하는 숲의 이미지로 시작하여 나무가 된 재연을 바라보는 지훈과 그가 쓴 글의 일부분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된다. 그의 내레이션은 “여자의 유방처럼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하얀 액체를 흘리는.......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유리정원>의 재연은 마지막까지 순수했어야 한다. 그는 초록으로 오염된 끝에 초록이 되었다. 결국 신수원의 캐릭터는 인간으로 써는 남지 못한다. 남성의 시각에서 본 더러운 순수로써 남아야 할 뿐이다.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두 가족의 하루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자동차 부품 공장의 인사관리팀장 준석(오동민)은 생산라인의 노동자에게 사직을 권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괴로워한다.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는정신질환 약을 먹을 정도로 육아에 시달리고 있고, 은행에 다녀오라는 준석의 닦달에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은행으로 향한다. 은행 앞에 세워둔 차에 아기를 두고 잠시 은행에 다녀오는 사이 차가 견인 당하자 은혜는 망연자실한다. 다른 가족은 준석과 같은 공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반장 현태(장준휘)는 부하직원을 권고사직시키라는 지시에 괴로워한다. 현태의 아내(조시내)는아들(김현빈)을 데리고 병원을 찾고, 아들이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내는 다친 팔목의 깁스를 풀고,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향한다. 아들은 난독증임에도 국어시간에 낭독해야 할 시를 계속 들여다본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가며 대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로카메라를 향한다. 두 가족,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들의 힘겨운 삶은 말 그대로 물속에서 질식해가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영화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시한다. 그들의 삶이 가진 시간차는 준석과 은혜의, 현태와 아내의 전화통화를 통해 좁혀진다. 96분의 러닝타임은 같은 시간을 각 인물의 시각에서 다시 보여주고, 각각의 시간을 모두의 하루로 봉합해가며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단일한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다섯 명의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방식은 그들 각자의 생존법을 보여주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몰아가는 사회적인 혹은 가족 사이의 사건들을 전시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술에 취해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괴로워하던 현태가 객사한 채로 발견되고, 은혜가 자동차에 두고 내린 아기 역시 응급실에 도착하지만 사망한다. 영화는 다섯 인물 각각의 삶과 고난을 전시하고, 그중 몇몇을 택해 그들이 죽은 모습을 담아낸다. 결국 소시민들에게 물속에서 숨 쉬는 법 따위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소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고발하기 위해 각 인물들의 불행을 전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전화통화로만 이어지는 준석과 은혜, 현태와 아내의 소통은 좁혀지는 시간차처럼 무언가 거리를 좁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각자의 고통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고현석 감독은 이러한 편집을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다섯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제각각 보여준다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인 현태에겐 클로즈업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 바스트 숏 이상의 클로즈업이 들어간 장면은 뮤직 펍에서 신청곡도 가능하냐고 묻는 장면 딱 하나뿐이다. 다른 인물들에겐 골고루 클로즈업이 들어갔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촬영은 관객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의 모습은 완전히 타자화된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가 약을 먹는 장면은 제시되지만 극 중 그것이 산후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준석의 윽박지름과 은혜가 저지르는 몇몇 사고만이 등장할 뿐이다. 결국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없이 그들의 고통만 전시하는 영화는, 그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와 짜증만을 남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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