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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북촌방향>과 <다른나라에서>를 시작으로 영화 속 시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온 홍상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이야기 자체의 변화까지 보여줬다. 그러한 변화는 홍상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홍상수 본인을 포함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영화 속 찌질한 남성들의 구애를 받아내는 위치였던 영화 속 여성에게 솔직함을 드러내고(<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들을 존대하기 시작했다(<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현실 속 여러 논란과 겹치는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다른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있지만) 홍상수 영화의 첫 여성 원 톱 주연 영화이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느껴진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밤의 해변에서의 혼자>의 주인공 영희(김민희)는 영화 내외적으로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아닌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조금씩 보여오던 변화가 비로소 완성되고, 새로운 단계의 홍상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손글씨 오프닝 크레딧을 버리면서 시작한다. 타자기로 적당히 친 것 같은 폰트의 오프닝 크레딧은 그의 전작들을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영화의 문을 연다. 2부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영희와 지영(서영화)이 함부르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영희는 함부르크로 찾아올지 아닌지도 모를 불륜관계에 있던 영화감독이자 유부남 상원(문성근)을 기다린다. 영희는 공원에 있는 다리를 건너기 전,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그의 소원은 상원이 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앞길을 바라는 소원이다. 2부에서는 영희가 준희(송선미)를 만나기 위해 강릉을 찾고, 선배인 천우(권해효)와 명수(정재영) 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천우, 명수, 준희, 명수의 애인인 도희(박예주)와 함께 하는 술자리와, 우연히 만나게 된 조감독 승희(안재홍)를 통해 만난 상원과 영화 스태프들과의 술자리, 총 두 번의 술자리가 등장한다. 사랑, 관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영희의 대사는, 때로는 현실의 논란이 생각나 실소가 터지기도 하지만, 자리의 다른 인물들을 찍어 누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자기파괴적인 영화이다. 2부의 세 남자 상원, 천우, 명수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배우들을 기용하고,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다시 소환해낸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술자리 장면에서 괴력의 연기를 선보이는 김민희의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대사로, 표정으로 찍어 누르고 압도하며 영화를 장악해나간다. 다시 말하자면,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영화 속에서 부수어버린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김민희의 연기를 빌어 파괴한다. 손글씨를 버린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원경에서 인물을 잡은 쇼트나 풍경을 잡은 쇼트 등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을 탐구해온 작가는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영화 속에 반영시켰고, 이번 영화를 통해 (그리고 현실의 사건을 빌어) 자신을 파괴한 뒤, 그 내면을 영화로 담아낸다. 김민희의 몸을 빌어 진행되는 홍상수의 자기파괴는 김민희에겐 자기 반영으로 느껴진다.



 1부와 2부엔 각각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등장한다. 1부의 남자는 공원에서 난데없이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묻는다. 모른다는 둘에게 “핸드폰 그런 것도 없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남자는 해변에서 김민희를 둘러업고 저 멀리 달려간다. 2부의 남자는 영희의 숙소 베란다 창문을 닦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방에 있는 영희, 준희, 천우 모두 남자의 존재를 그가 마치 유령인 것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남자는 창문을 닦지만, 깨끗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더럽기만 하다. 어느샌가 그는 닦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이 남자는 홍상수가 영화 속에 등장한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준다. 누군가의 시간 안에 들어오고, 그를 데려가며, 투명해지려 계속 창을 닦지만 깨끗해지지 못하는 사람. 자기파괴적인 그의 영화에 등장한 (그의 영화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캐릭터는 그의 분신으로써 영화에 끼어든다. 이야기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유령으로써 영화 안에 등장하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까지 조금씩 변화를 보이던 그의 영화가 만든 하나의 결과물이다. 현실과 영화가 뒤섞인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의 신작은,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영화 세계의 새 단계를 연다.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초기작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만든 영화가 아닐까? 이자벨 위페르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고, 그의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 정진영, 어김없이 다시 출연하는 김민희가 뭉친 홍상수의 차기작 <클레어의 카메라>가 기대된다.6/220967125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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