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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노>의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 콤비가 <툴리>를 통해 다시 한번 만났다. 특히 <주노>를 비롯해 <어바웃 리키>, <죽여줘 제니퍼>, <영 어덜트> 등 여성 중심적 서사를 선보여왔던 디아블로 코디의 실력이 <툴리>에서도 발휘된다. <툴리>는 이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고, 이제 막 셋째 아이가 태어난 마를로(샤를리즈 테론)가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고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낸다.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는 둘의 이야기를 통해 임신과 출산 이후 겪는 여성의 경험, 독박육아와 돌봄노동과 가사노동과 가족관계 등의 경험을 숨 가쁘면서도 유기적으로 경유한다. 이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독박육아로 인한 극단적 피로감과 우울함을 폭로하는 것뿐만이 아닌, 연애,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여성의 삶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숨이 턱 막힌다. 만삭의 마를로는 주의력결핍 과다활동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은 아들과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기르는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9개월 간의 임신으로 마를로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졌고, 피곤함은 얼굴을 녹여버릴 기세로 그의 피부에 들러붙어 있다. 남편이 직장에 가 있는 동안 만삭의 몸으로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던 중 셋째 아이를 낳게 되고,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은 더 이상 그를 돌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를 한다. 악재가 겹친 마를로는 오빠가 제안했던 야간 보모를 들이기로 결정하고, 툴리가 그의 집에 도착한다. 마치 수차례 일을 해본 것처럼 능숙하게 일하는 툴리는 “나는 아기가 아니라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라고 마를로에게 말한다. 그리고 정말로, 툴리는 육아뿐만 아니라 그동안 밀려 있던 청소와 요리까지 해결해주고, 마를로는 정말로 오랜만에 푹 잠잘 수 있게 되고, 아이들, 남편과 함께하는 문자 그대로의 생활을 되찾게 된다. <툴리>를 여기까지만 본다면 독박육아의 고됨만을 폭로하는 영화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는 반전을 심어 놓는다. 마를로와 툴리는 어느 날 교외를 벗어나 브루클린에서 술을 마시게 된다. 툴리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마를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오는 길, 마를로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낸다. 그런데 사고가 난 차량의 조수석엔 툴리가 없다. 이어지는 병원 장면에서 마를로의 결혼 전 성이 툴리였음이 밝혀진다. 툴리는 마를로가 부른 보모가 아니라 마를로의 26살 시절이 투영된 환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몸의 약화와 독박육아 등으로 인해 찾아오는 산후우울증을 보여줌과 동시에, 결혼 이후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는 역할을 맡게 되어버린 여성의 삶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생명과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건강과 삶에 피폐함을 가져오는 저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여성적인 경험, 그러한 삶을 보여주며 이것은 저주이자 기적임을 보여준다. 툴리의 환영이 보이고 난 후 마를로가 보여주는 표정을 단순히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적 영향으로만 볼 순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신체와 정신이 모두 피폐해졌음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툴리>가 마를로로 대표되는 임신-출산-육아에 걸친 여성의 삶을 경유하여 드러내는 것은, 선택지가 저주이든 기적이든 간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지금의 구조이다. 마를로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툴리를 소환하여 이를 기적으로 보이게 하던, 남편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출장도 다녀오고, 밤엔 침대에 누워 게임기를 쥐고 좀비들을 쏴 죽이고 있을 뿐이다. 마를로의 오빠 또한 보모라는 일종의 아웃소싱을 제안할 뿐, 그가 실제로 아이들을 돌보는데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남편은 마를로가 사고를 당한 이후 병원에서 “우리를 사랑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우리’는 마를로와 자신만을 칭하는 것일까, 세 아이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너와 나라는 일대일적인 애정을 벗어나 우리라는 틀로 부부 혹은 가족을 지칭하고, 이러한 말이 실천으로 옮겨갔을 때 성평등한 가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육아와 가사노동에 있어서 남편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선 관계적, 감정적 실천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툴리>의 가장 큰 성취이다. 때문에 ‘우리’라는 단어는, 마를로와 같은 여성의 삶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공감했을 때 가능한 말일 것이다. 그 '우리' 안에 툴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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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일디코 엔예디의 18년 만의 컴백작이다. 장르적으로는 판타지와 로맨틱 코미디를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옥자>의 도살장 장면보다 더욱 적나라하게 실제 도살장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며, 오프닝 시퀀스부터 등장하는 눈 덮인 숲 속의 사슴들은 등장할 때마다 자연 다큐멘터리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영화의 단편적인 부분만 늘어놓고 본다면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이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와 주제는 명확하다. 안드레(게자 모르산이)는도살장의 재무이사다. 그는 도살장에 새로 온 품질관리사 마리어(알렉상드라 보르벨리)를 보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어느 날, 도살장에서 교미 약품 도난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찾기 위해 전 직원이 연례 정신위생검사를 앞당겨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안드레와 마리어는 서로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꿈속에서 둘은 사슴이 되어 눈 덮인 숲 속을 거닌다. 둘은 서로가 꿈을 공유하는 것에 대해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안드레는 왼팔이 불구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오른팔로 붙잡고 있거나 축 늘어진 상태로 내버려둔다. 신체적으로 결핍이 있는 안드레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톤 다운되어 있다. 혼자 살기에 제대로 집안 청소도 하지 않는 그의 집은 항상 어두컴컴하고, 축 늘어진 그의 왼팔처럼 소파 위에서 TV를 보다 늘어져 잠드는 게 그의 일상이다. 왼팔 때문에 왼쪽으로 조금 기운듯한 그의 몸은 카메라의 잡히는 모습 자체로 그의 결핍을 설명한다. 미리어는 기억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좋다. 자신이 수두에 걸렸다 완치된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드레가 그녀에게 내뱉은 17번째 문장을 정확하게 읊어주기도 한다. 놀라운 기억력 때문일까, 망각의 동물이 망각을 하지 못하면 고장 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마리어는 정신적 결핍을 겪는다. 여전히 아동 전문 심리상담사에게 찾아가며, 자신이 정한 선과 규칙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식탁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치우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마리어가 결벽증이 있다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마리어를 어떤 선 안에 두려 한다. 그림자, 계단 손잡이, 거울, 기둥 등의 선들은 영화의 프레임을 더욱 잘게 쪼개 그 안에 마리어를 위치시킨다. 타인과 대화도, 신체적 접촉도 수월하지 않은 그는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던 선 안에 갇혀있다.



 안드레와 마리어는 꿈속에서 사슴이 되어 만난다. 그들이 만나는 눈 덮인 숲은 각자가 가진 결핍을 넘는 환상의 공간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몸을 비비고, 먹을 풀을 찾고, 시냇물을 마신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선들을 지나친다. 아니, 나무라는 선들은 스크린 내부에 존재하는 두 사슴과 분리되어 스크린의 외피에 누군가 그어버린 선처럼 붕 떠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나무들을 자연스럽게 지나치기도, 그사이를 맹렬하게 돌파하기도 한다. 결국 꿈이라는 공간에서 둘의 영혼은 몸을 벗어나 교감한다. 안드레는 마리어를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데려가지만 변해버린 식당 때문에 실패한 데이트가 되고, 마리어는 음악을 들으며 감정을 익히려 하고 안드레와의 연락을 위해 핸드폰도 사보지만 그의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린다. 꿈이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 그들은 계속 다양한 결핍을 마주하고 한 순간 좌절한다. 안드레와의 관계가 실패했다고 느낀 마리어는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시도한 감정적 관계의 실패 앞에 자신의 왼팔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담배도, 유흥도, 여자관계도 끊었다는 안드레는 다시 전 애인(아내?)과 섹스를 한다. 얼핏 보면 각각의 정신적, 신체적 결핍이 뒤바뀌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결국 만나 섹스를 하고, 더 이상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환상의 공간에서 겪는 영혼의 교감이 필요했던 그들은 육체를 지닌 현실에서 감정을 나눈다. 때문에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영혼과 육체에 어떤 위계를 부여하는 대신, 현실-꿈이라는 각각의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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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초반부를 보고선 놀랐다. 약 37분간 이어지는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원테이크의 퀄리티가 너무나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 촬영 현장에 좀비가 등장한다는 참신한 설정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앞의 37분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나머지 한 시간 가량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37분의 짧은 영화가 지나가면 <One Cut of the Dead>라는 제목과 함께 엔드크레딧이 올라가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진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다. 극 중 시간은 한 달 전으로 되돌아가고, <One Cut of the Dead>라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영화의 나머지를 채운다. 고만고만한 퀄리티의 예능 프로그램 재연영상을 연출하던 타카유키(하마츠 타카유키)는 모두가 거절하던 생중계 원테이크 좀비 영화의 연출을 얼떨결에 맡게 되고, 아이카(아키야마 유즈키), 카미야(나가야 카즈아키) 등의 배우들과 마오(마오), 하루미(슈하마 하루미) 등 타카유키의 가족들이 영화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 시간 가량의 <One Cut of the Dead> 제작기는 촬영을 준비하는 30분 정도의 분량과 실제 촬영이 진행되는 모습을 담은 30분가량으로 나뉜다. 결국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One Cut of the Dead>의 본편이 등장하는 1부, 본편의 기획이 드러나고 타카유키를 비롯한 참여진들의 캐릭터가 그려지는 2부, 본편을 촬영하는 모습을 담아낸 3부로 구성된 작품이다. 물론 영화 안에서 구성을 나누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관람하면서 충분히 구분 지을 수 있다. 전체 95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빈틈없이 꽉 채우고 있는 구성은 1부에 등장하는 허술함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구성은 <One Cut of the Dead>의 촬영 현장을 담은 3부의 코미디를 강력하게 만들어준다. <One Cut of the Dead>가 허술했던 이유, 영화의 허술함을 채우고 있던 뜬금없는 개성 등이 등장한 이유가 밝혀지면서 관객들을 폭소할 수밖에 없다. 1부와 2부를 지켜본 관객은 이미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캐릭터들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을 수밖에 없고, 여기서 만들어지는 페이소스가 3부의 강력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제목처럼 고집 있는 태도와 번뜩이는 아이디어, 철저하게 구성된 각본이 이 영화를 가능케 한다. 아마도 올해 최고의 코미디 영화를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꼽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나 루치오 풀치의 <비욘드> 같은 괴상한 영화들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이런 괴상망측한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 대체 누구냐고 반문해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영화의 결과물이 어떻든 그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영화를 옹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핵심도 거기에 있지 않다. 이 영화의 핵심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을 때의 희열과 쾌감이다. 대담한 형식의 코미디로 관객들을 폭소케 하다가, <One Cut of the Dead>의 생중계를 끝내고 희열로 가득한 배우와 스태프들의 얼굴을 담아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이 영화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기에 더욱 놀랍기만 하다. 영화의 (정말 마지막) 엔드크레딧은 <One Cut of the Dead>를 찍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실제 제작진의 모습과 함께 등장한다. 어찌 보면 액자 속의 액자라는 독특한 구성이기도 하다. 정신없는 초반부의 원테이크부터 후반부의 폭소와 엔딩의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 실제 스태프들이 등장하는 엔드크레딧이라는 구성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가 어떤 걸작의 위치를 차지할 영화는 아니겠지만,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의 위치는 그 어느 걸작들과 비교해봐도 크게 뒤지지 않는 것 같다.

수잔나 포겔의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폴 페이그의 <스파이>를 연상시킨다. 현장요원에 투입된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점, 주인공이 호감을 품고 있는 스파이가 영화 초반부에 사망한다는 점 등등 이야기에서부터 유사한 지점이 많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오드리(밀라 쿠니스)는 남자친구 드류(저스틴 서룩스)에게 문자로 이별을 통보받는다. 오드리의 절친인 모건(케이트 맥키넌)은 오드리에게 드류의 물건들을 태워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던 중 세바스찬(샘 휴건)이 나타나 드류의 정체는 CIA 요원이며 오드리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한다. 드류가 갑자기 돌아오고, 어느 물건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전달해달라는 이야기를 남긴 뒤 살해당한다. 얼떨결에 오드리와 모건은 비엔나로 향하고, 둘이 지닌 물건을 탐내는 악당들이 그들의 뒤를 쫓는다. <스파이>의 수잔(멜리사 맥카시)이 처음부터 요원이기는 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너무 강력한 비교대상이 꽤나 가까운 시점에 개봉했다는 점도 그렇고, 전체적인 완성도를 놓고 봐도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스파이>의 장점, 가령 팻쉐이밍 되는 여성의 외모나 현장에 투입되지 못하는 현실 등을 전복시키면서 오는 코미디가 <나를 차버린 스파이>에는 부족하다. 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것에서부터 이미 지겹게 등장한 남성 스파이 영화들보다는 즐거움을 주지만, <스파이>와는 다르게 단순한 킬링타임용 영화에 그칠 뿐이다. <스파이>를 비롯한 여성 중심 액션 코미디 영화 몇 편이 성공을 거두면서, 밀라 쿠니스와 케이트 맥키넌이라는 두 배우의 힘에 기대어 기획된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발군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케이트 맥키넌의 모습이나, 최근 <배드 맘스> 등의 코미디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밀라 쿠니스의 연기가 아니라면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성립하지 못했을 영화이지 않았을까? 특히 이 영화의 남성 캐릭터들이 그다지 멋지지 않음에도 멋있게 그려지려 했다는 점에서부터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스파이>의 장점을 잊어버린 작품이 된다.



 본격적으로 좌충우돌이 시작되기 전의 초반부만 넘기면,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킬링타임용 액션 코미디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한다. 이런저런 액션들은 어느 정도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케이트 맥키넌의 존재감은 영화가 지루해지려 하면 다시금 웃음을 선사해준다. 또한 <엑스파일> 시리즈의 스컬리, 질리언 앤더슨이 MI6의 국장으로 등장하는 것도 의외의 웃음 포인트가 된다. 실제로 질리언 앤더슨의 열렬한 팬인 케이트 맥키넌이 극 중에서 그에게 구애를 보내는 것은 이번 영화의 가장 즐거운 포인트 중 하나이다. <스파이>나 <고스트 버스터즈> 등의 작품에 열광했던 관객이라면, 앞선 작품들보단 아쉽지만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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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의 19번째 장편영화 <코코>는 역대 픽사의 작품 중 가장 디즈니스러운 작품이 아닌가 싶다. 물론 픽사의 작품들이 디즈니가 다뤄오던 가족주의를 놓지 않은 적은 없다. 다만 그것의 형태는 <토이스토리> 속 장난감들의 연대나 <몬스터 주식회사>의 종족을 뛰어넘는 유사 부녀관계와 세대격차를 넘는 <업>의 유사 부자관계, <니모를 찾아서> 속 이방인 및 장애인과의 연대, 결국 가족으로 회귀하는 <인사이드 아웃>의 엔딩. 결국 픽사, 그리고 디즈니가 표방하는 가족주의는 조금 거칠게 말해서 <분노의 질주> 시리즈 속 ‘Familism’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픽사는 그것을 더욱 영화적으로, 새로운 소재를 통해 독창적으로, 그리고 아름답게 담아내는 능력을 지닌 곳이다. <인크레더블> 정도를 제외하면 픽사엔 가족을 전면으로 내세운 영화는 없지만, 그만큼 자신들의 테마를 표면적으로는 은폐하면서 감정적으로는 진하게 전달하는 내공을 쌓아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코코>는 <인크레더블> 이후 처음으로 가족이 주인공인 픽사의 영화다. 주인공인 멕시코 소년 미구엘(안소니 곤잘레스)은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음악가 고조할아버지 때문에 음악이 금지된 집안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을 출신의 유명한 뮤지션 델라크루즈(벤자민 브랫)를 흠모하며 몰래 뮤지션의 꿈을 키워간다. 우연히 델라 크루즈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발견한 미구엘은, 그의 무덤에 걸린 기타를 훔쳐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려 한다. 그러나 미구엘이 기타를 치는 순간, 미구엘은 산채로 사후세계에 가게 된다. 미구엘은 그곳에서 의문의 남자 헥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를 만나고, 사후세계에서의 모험을 시작한다.



 미구엘이 사후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당연하게도 죽은 가족들이다. 미구엘은 고조할머니 이멜다(알리나 우바치)를 만나고 그의 축복을 받아 이승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뮤지션인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떠난 것을 증오하는 그는 미구엘이 음악을 그만둘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때문에 미구엘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일 것으로 여겨지는 델라 크루즈에게 축복을 받아 이승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굉장히 도식적이다. 픽사는 그간 애니메이션 속에서 범죄, 액션, 스릴러, 호러,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영화의 클리셰 또는 직접적으로 장면을 가져와 활용했지만, <코코>에서는 그것이 유독 도식적으로 느껴진다. 가령 처음 공연하는 미구엘의 노래에 당연하다는 듯이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과 헥터와 자연스럽게 협연하는 모습 등에서 이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러한 기시감은 자신의 꿈과 가족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흔하디 흔한 설정에서도 이어진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 이르러서, 픽사는 더 이상 새로운 소재를 통해 독창적인 방식으로 가족주의를 포장하려는 시도를 멈추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픽사 특유의 반전 서사(그 사람이 선한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악당이었어! 그리고 보잘것없는 옆자리 누군가가 진짜였어!)는 <코코>에 들어서면 적극적으로 가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된다. 장난감, 감정, 물고기, 몬스터 등을 소재로 삼아온 픽사가 현실 전통에 기반을 두고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코코>의 멕시코식 사후세계를 그려냈다는 점 또한 그렇다. 어쩌면 디즈니가 <겨울왕국>의 자매애, <모아나>의 여성 영웅 등으로 남성 중심 세계관과 가족주의를 조금씩 덜어내는 것에 대한 반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픽사는 익숙한 가족주의 서사를 세련된 신파로 직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스튜디오다. 이것은 단순히 3D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속 인물과 배경을 실사에 가깝게 그려내는 기술력이나, 아름다운 사후세계의 풍광을 그려내고 기억에 남을 귀엽고 예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 시리즈나 <월 E> 등의 작품을 통해 <싸이코>나 여러 서부극,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의 영화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변주하고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코코> 역시 이러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속 영화로 등장하는 델라 크루즈의 영화들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B급 할리우드 서부극 혹은 액션 영화들을 연상시키며, 후반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뮤지컬 액션 시퀀스는 <007> 시리즈 등의 첩보 액션물에서 보아온 리듬감을 선보인다. 또한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이민자들을 의식한 듯 멕시코의 명절인 망자의 날에 대한 섬세한 고증과 그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춘 것은 <코코>가 지닌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일 것이다. 동시에 망자의 날이라는 문화가 한국의 추석을 연상시키기도 해 익숙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코코>는 관객보다 영화가 먼저 울며 주접떠는 지루한 신파극과는 달리, 다소 도식적인 가족주의를 깊고 진하게 전달한다.



 <코코>를 비롯한 픽사의 작품을 단순한 상품으로 남게 하지 않는 부분은 각 영화가 지닌 영화적인 순간들에서 비롯된다. 특히 <코코>에서는 악당의 실체가 영화 속 카메라로 촬영되어 영화 속 스크린으로 생중계되며 폭로된다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러한 방식을 픽사의 작품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코코>의 연출자인 리 언크리치의 장편 데뷔작인 <몬스터 주식회사>는시뮬레이션 룸을 통해 비슷한 상황을 연출해 냈으며, 픽사의 다른 작품인 <월 E> 또한 함장실의 카메라를 통해 기계장치의 음모를 우주선내 승객들에게 폭로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토이 스토리 2>의 TV CF나 <토이 스토리 3>의 CCTV, <인사이드 아웃>에서 감정들이 라일리와 시각을 공유하는 스크린 역시 유사한 전략을 위해 기능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대부분 아이 혹은 아이를 보호 내지 공유하는 존재들(미구엘의 사후세계 가족, 몬스터, 아이들처럼 무력해진 승객들의 함장 앤디의 장난감, 라일리의 감정들)에 의해 구현된다. 이 장치들은 소위 ‘어른의 세상’이라 일컬어지는 동심 밖의 세계를 관객에게 폭로한 뒤, 보호자에 의해 대상을 구해내면서 다시금 그러한 폭로를 봉합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그 세상을 봤고, 서사는 이를 통한 그들의 성장을 그려내며 막을 내린다. 보호자와 보호대상이 모두 아이들이 아닌 혹은 서사의 주인공이 보호자이거나 그와 동일시되는 몇몇 작품(<토이 스토리 3>, <월 E>, <인사이드 아웃>)이 픽사의 걸작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때문에 <코코>는 앞선 걸작들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서사 속 가족주의를 봉합하는데 그칠 뿐이다. 



 <코코>는 분명 뛰어난 작품이다. “역시 픽사”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서사는 매끄럽게 흘러가고, (몇몇 관객이 부르짖는) 개연성의 구멍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며, 섬세한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멕시코식 사후세계의 아름다움은 디즈니의 <라푼젤>이나 <겨울왕국> 등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여기에 ‘Remember Me’로대표되는 OST 또한 <코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가사를 통해 서사를 진행시키는 정통 뮤지컬 영화는 아니지만, <코코>는 뮤지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음악영화로서도 훌륭하다. 다만 영화가 담고 있는 도식적인 가족주의 서사는 아쉬움을 남긴다. (유사)부자관계, 강아지(혹은 동물)의 동행, 영웅으로 묘사되던 인물의 반전 등은 <업>을 비롯한 픽사와 디즈니의 작품에서 수 차례 반복되어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토이 스토리 3>와 <인사이드 아웃>을 제외하면 최근 몇 년간의 픽사의 영화들은 아쉽게만 느껴진다. <도리를 찾아서>와 <몬스터 대학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전작의 벽을 넘지 못했고, <카> 시리즈는 여전히 픽사 작품 중 가장 아쉬운 시리즈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굿 다이노>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놀라운 기술력만이 남은 범작이었다. <코코>는앞선 범작들과 걸작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동시에 픽사-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들이 공유하는 지점과 한계점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앞으로 개봉 예정인 픽사의 작품은 <인크레더블 2>와 <토이 스토리 4>이다. 과연 픽사는 <코코>가 드러낸 진부함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여기서 머물고 말 것인지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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