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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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말~9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지금은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캐릭터들은 왜 자꾸 21세기의 스크린에 소환되는 것일까? <스타 트렉>의 레너드 니모이, <트론>의 제프 브리지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익스펜더블>의 브루스 윌리스와 실버스타 스탤론을 비롯한 하드 보디 액션 배우들…… 그중 해리슨 포드는 그 흐름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는 <레이더스>, <스타워즈>, <블레이드 러너>의 인디아나 존스, 한 솔로, 데커드 형사를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혹은 현재까지도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들을 다시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있다. 나이 든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는 이제 아버지가 된 아이콘의 초상으로 그려진다. <인디아나 존스: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의 인디아나 존스는 자신의 모험을 아들인 머트에게 물려주려 하고(모두가 알고 있듯이 영화 자체가 실패해버려 인디아나 존스의 대물림은 성공하지 못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한 솔로는 <스타워즈>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이야기를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며 캐릭터에 대한 결산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떠할까?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인조인간), 인간의 감정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 구성 요소는 기억인가, 기억과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는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인 것일까, 여기서 상정되는 인간성의 기준은 무엇일까?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으며, 데커드 형사는 레플리컨트와 인간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영화의 여백을 온갖 질문으로 채우는 캐릭터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러한 정체성의 방황을 차단하고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극의 주인공인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이 레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K는 전작의 레플리컨트와는 다르게 인간에게 복종하는 월레스(자레드 레토)의 기업이 만들어낸 신형 모델이다. 그는 구형 레플리컨트 중 한 명의 시신을 발견하고, 유골에 남은 흔적을 통해 그녀가 출산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63분의 기나긴 러닝타임 중 대부분의 시간은 이 흔적을 통해 레플리컨트가 출산한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데 할애된다. 꽤나 당연하게도 이 유골은 전작에서 타이렐(조 터켈)이 자신의 조카의 기억을 주입해 만들어낸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인 레이첼(숀 영)이며, 그녀가 출산한 아이는 데커드와의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K는 이를 추적하던 중 자신에게 주입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떠올린다. 여정의 어느 순간 K는 자신에게 심어진 기억이 심어진 것이 아닌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K는 자신이 레이첼과 데커드의 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렇게 전작이 질문을 던진 테마 중 기억에 집중하며 극을 전개한다. K는 목각인형을 소각로에 숨긴 기억이 주입된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직접 소각로에 찾아가 그곳에 숨겨진 목각인형을 손으로 만지는 순간 그 기억의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는 자신에게 실재했던 일로 기억하는 행위의 매개로 촉각을 이용한다. 레플리컨트에게 심어진 기억은 아나 스텔라인(카를라 주리)와 같은 사람에 의해 무균실에서 상상력을 동원에 만들어진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K의 기억처럼 그저 환영으로 존재한다. 이 환영을 촉각으로써 느끼는 순간 K는 기억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촉각을 통해 환영을 실제로 만들어내려는 욕망은 K의 홀로그램 A.I. 애인인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를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홀로그램이기에 K를 만질 수 없는 조이는 끝임 없이 K가 존재하는 세계와 자신을 동기화시키려고 한다. K가 조이를 휴대용 콘솔을 통해 집 밖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한 직후, 조이는 K를 따라 테라스로 나가 비를 맞는다. 물론 조이는 홀로그램이기에 비는 그녀의 몸을 뚫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감을 느끼려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구성하는 홀로그램의 영상을 육체를 지닌 존재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빗방울은 조이의 손을 뚫고 지나가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이라는 영상에 빗방울을 추가한다. 결국 조이와 K는 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촉감을 통해 자신이 혹은 자신의 기억이 실재함을 증명하려 한다. K는 기억을 추적하는 여정을 통해 욕망을 내비쳤다면, 조이는 K의 세계에 끝임 없이 자신의 영상을 동기화시키며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섹스신은 이러한 욕망을 가장 괴상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조이는 길거리의 매춘부 레플리컨트인 마리에트(맥켄지 데이비스)를 데려와 그녀의 몸의 자신의 영상을 동기화한다. 마치 <그녀>의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이 매춘부를 불러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육체적인 관계를 꾀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이야기가 나왔으니덧붙이자면, 세세한 설정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빅데이터에 연결된 A.I. 애인이라는 점에서 둘은 거의 유사하다. 때문에 성적으로, 여성이라는 틀 안으로 대상화되는 조이의 캐릭터는 인간을 상대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된 초월적인차원으로 나아가는 사만다의 캐릭터에 비해 심각하게 퇴행적이다. 물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제가 그것은 아니었지만) 조이는 이러한 동기화를 통해 자신의 물성을 증명하려 시도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자신이 K와 같은 세계에 실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믿는다.



 조이와 K의 믿음은 산산이 박살 난다. 외부 콘솔과의 연결을 끊은 채 K의 휴대용 콘솔에만 남길 선택한 조이는 월레스의 수하인 레플리컨트 러브(실비아 획스)에 의해 파괴되고, K의 기억은 데커드의 딸 아나 스텔라인의 실재했던 기억이 복제되어 주입된 것이다. 동기화를 통한 실존에 대한 조이의 욕망은 짓밟혔고, K가 촉각을 통해 느꼈던 기억은 그에게 실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기어이 데커드를 발견하고 그와 주먹을 주고받으며 그의 존재를 자신의 기억 속 어느 부분으로 받아들이려던 K의 욕망은 헛수고가 되었다. 러브에 의해 조이가 파괴되고 데커드가 끌려간 시점에서 K는 레플리컨트 저항 운동의 지도자 프레이자(히암 압바스)에게 구조된다. 프레이자는 K에게 데커드가 어떠한 말도 월레스에게 발설할 수 없도록 그를 죽일 것을 요청한다. 다시 데커드를 찾아 길을 떠나던 K는 조이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만난다. 누드 상태의 거대한 홀로그램인 조이는 길거리의 매춘부처럼 K를 불러 세운다. 광고의 조이는 당연히 K의 조이가 아니지만, K를 그녀를 통해 어떤 위안을 받고 결심을 지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K는 러브에 의해 이송되고 있던 데커드를 찾아내고, 러브를 죽인 뒤 데커드를 죽이지 않고 구출한다. 그리고 데커드와 함께 그의 딸인 아나 스텔라인이 있는 무균실을 찾아간다. K는 건물의 계단 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추정되)고 데커드는 딸과 재회한다.



 여기서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촉각 하는 것을 통해 실재함과 기억에 접근하던 영화는 그것을 철저히 붕괴시킨 뒤, 딸에 대한 데커드의 부정(父情)을내세우며 K의 인간성을 드러낸다. 드니 빌뇌브는 이러한 K의 선택을 인간성이라 부르려 한다. 드니 빌뇌브는 <어라이벌> 속 플래시포워드의 활용처럼,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할애하며 캐릭터가 쌓아온 논리를 붕괴시키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때문에 K의 캐릭터가 방황하는 것은 데커드의 방황과 차이가 느껴진다. 데커드가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방황하며 남긴 여백들은 필립 K. 딕의 원작이 제시한 질문들로 채워졌다면, K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방황하며 남긴 여백은 그저 비어 있다. 로저 디킨스의 놀라운 촬영과 한스 짐머의 공격적이면서 동시에 차분하기도 한 음악은 이러한 여백을 은폐한다. 결국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영화가 100여분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그려낸 기억이라는 테마는 붕괴된 채, 전작에서도, 그리고 영화 안팎으로 절대 결론지어질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만을 답습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결말에서 <그을린 사랑>부터 <어라이벌>까지 이어지는 드니 빌뇌브의 캐릭터에 대한 착취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착취 끝에 얻은 결론이 딸에 대한 데커드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에 비해 진보는커녕 퇴보한 결과물이다. 이는 어쩌면 과거의 아이콘을 현재의 스크린으로 다시 소환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수많은 시퀄들의 운명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거의 아이콘인 남자들은 나이 들어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고(아버지에 머무는 상상력은 또 얼마나 진부한지), 이러한 아버지들은 자식 세대를 위해 퇴장하거나 부성을 강조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기에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세계관을 이어가는 연출가/작가의 상상력)는 태생부터 전작에 비해 진보할 수없다. 그렇기에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드니 빌뇌브 특유의 착취적인 캐릭터 활용 방식과 과거의 아이콘을 끌어 쓰는 시퀄의 한계점이 맞물려 탄생한 괴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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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은 걸작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가 뒤이어 만든 영화들도 (호불호와는 별개로) 각자의 개성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었다. 1998년의 <에이리언 4> 이후 명맥이 끊겨있던 프랜차이즈를 다시 가동한 것은 시리즈의 창조주 리들리 스콧이었다. 2012년 프리퀄 아닌 프리퀄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연출했고, 그 영화를 통해 인류의 창조주와 에이리언 종족의 등장을 알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조금 더 상세한 에이리언의 기원을 그린다. 프랜차이즈의 창조주인 리들리 스콧이 창조주로써의 자의식을 마음껏 드러낸 영화랄까?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탐사선 프로메테우스를 보낸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욕구와, 웨이랜드의 창조물인 A.I.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그를 보고 키운 창조의 욕망은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을 에이리언의 세계관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전자의 욕구를 담았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후자의 욕망을 담았다. 다만 SF 호러 장르로의 회귀와 리들리 스콧의 욕망은 종종 엇나가면서 영화 전채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1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영화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엘리자베스 쇼(누미 라파스)와 함께 엔지니어의 함선을 타고 떠난 데이빗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엔지니어의 행성에 도착하고, 검은 액체를 뿌려 그곳의 생명체를 학살함과 동시에 그들을 숙주로 삼아 에이리언들을 탄생시킨다. 함선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데이빗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플래시백 시퀀스는 창조주의 전지적인 시점에서 진행되는 재앙-창조의 스펙터클을 담아낸다. 프랜차이즈의 기원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고, 창조했음을 알리려는 과시적인 장면이다. 마이클 패스벤더를 데이빗과 신형 A.I.인 월터로 분리하고, 데이빗이 월터를 파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창조주가 되려는 리들리 스콧의 마음이 엿보인다. 인간이 가진 어떤 절제, 선함을 상징하는 월터를 데이빗과 같은 형상으로 설정한 뒤 데이빗이 그를 파괴하게 되는 전개는,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데이빗의 행동과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이 뒤섞인 장면이다. 이런 경향은 데이빗이 바그너의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들으며 커버넌트호 안의 태아 보관실로 들어가 냉동된 페이스 허거의 유충을 보관함에 넣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바그너의 음악을 블록버스터 크리처 영화에 녹여내는 것은 물론, 연출자의 자의식을 1억 달러 예산의 블록버스터에 과시적으로 집어넣을 감독이 또 있을까? 그 결과물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리들리 스콧의 뚝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데이빗과 월터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납작해지고, 어느 부분에선 납득하기 힘든 대사와 행동을 이어간다. 포스터 상 주인공이었던 대니얼스(캐서린 워터스틴)의 존재감은 미미한 수준이고, 그의 연인이자 선장인 제이크는 왜 제임스 프랭코라는 이름값을 사용했는지 모를 정도로 짧은 분량 동안 출연한다. 제이크의 뒤를 이어 선장이 된 오람(빌리 크루덥)의 행동은 ‘저 사람이 어떻게 식민화 프로젝트의 선원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을 남긴다. 테네시(대니 맥브라이드) 등 다른 선원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2000명의 냉동인간과 1000여 개의 태아를 운송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마저도 창조주의 관점에서 캐릭터들을 소비한다는 리들리 스콧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관객이 마음 둘 캐릭터 하나 없이 영화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SF 호러 장르로서의 기능을 반감시킨다.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는데 어떻게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네오모프의 탄생처럼 몇몇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 있지만, 그 장면들은 그저 잔혹하고 끔찍하기만 할 뿐 공포스럽지는 않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제노모프와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네오모프의 모습은 기괴하지만 공포보단 스크린에서 만나 반갑다는 감정이 먼저 피어오른다.



 결국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사이에 존재하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과정을 압도적인 비주얼을 동원해 보여주던 <프로메테우스>의 철학적 면모는 SF 호러 장르에 희석되었고, SF 호러 장르가 지녀야 할 기괴함과 공포, 서스펜스 역시 리들리 스콧의 과시적인 연출이 파묻혀버렸다. 애매한 자리에 위치한 이 영화는 관객의 상상에 맡겼을 때 가장 재미있었을 부분을 프랜차이즈의 창조주가 경전에 새겨버리는 영화다.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과도한 간섭은 오히려 흥미를 떨어트린다. 프랜차이즈를 마무리 짓는 적절한 시점을 놓쳐버린 영화의 결과물은 그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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