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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 기사가 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할리우드를 비롯한 전 세계 영화계, 예술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이 얼마나 많았는지 폭로되고, 이를 통해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고, 과거의 기억을 다시금 불러오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미디어와 SNS 속 익명의 개인들은 피해자의 진술 속의 모순을 끄집어내며 2차가해를 일삼았다. 여성인권영화제를 통해 관람한 제니퍼 폭스의 첫 픽션인 <이야기>는 중년의 나이가 된 주인공이 13살 때 경험한 성폭력 피해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니퍼 폭스 본인의 경험을 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이기에, 115분의 러닝타임은 묻어 뒀던 기억을 끄집어내고 가해자를 고발하는 그녀의 경험을 쫓아가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제니퍼 폭스(로라 던, 감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캐릭터)의 어머니(엘렌 버스틴)가 우연히 제니퍼가 13살 때 쓴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어머니가 보낸 글을 다시 읽으며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여름방학에 승마를 배우러 제인(엘리자베스 데비키)과 빌(제이슨 리터)이 있는 곳으로 갔던 제니퍼는 방학 이후에도 주말마다 그곳을 다시 찾는다. 제니퍼가 둘과 친밀해지자, 빌은 사랑이라는 말로 제니퍼를 가스라이팅한다. 영화는 묻어둔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현재 시점의 제니퍼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13살의 제니퍼(이자벨 넬리스)가 번갈아 가며 영화가 전개된다.



 <이야기>라는 영화의 핵심적인 형식은 플래시백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대학교수인 제니퍼는 해외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에게 어릴 적에 쓴 글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순간부터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종종 보이스오버를 통해 현재 시점과 중첩되기도 하는 플래시백들은 제니퍼를 습격한다. 잊었던 기억이 다시금 그녀의 삶을 강타하기에 습격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습격하는 플래시백들은 제니퍼가 자신의 글을 다시 읽고, 빌과 제인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고, 당시에 함께 승마를 배웠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확장된다. 때문에 <이야기>는 제니퍼의 플래시백(기억)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추리극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당시 자신의 체구가 제니퍼 스스로가 생각한 것보다 작았을 때 플래시백 속 어린 제니퍼 역할의 배우가 더 어린 배우로 바뀐다거나, 뒤늦게 기억해낸 요소들-가령 벽난로가 켜져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나 당시에 있었던 인물들의 숫자 등-에 따라 플래시백이 재구성되는 장면들은 실제 사건의 피해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제니퍼의 시점에서 이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녀는 종종 기억 속 어린 자신 혹은 제인을 인터뷰하기도 한다. 플래시백 속에서 벌어지는 인터뷰 혹은 기억과의 대화를 통해 제니퍼의 기억은 재구성과 확장을 거듭한다. 결국 제니퍼가 빌을 찾아가 가해사실에 대해 따져 묻는 모습이 영화의 가장 후반부에 등장한다.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까지 제니퍼는 자신의 기억을 계속해서 재구성했다. 재구성의 과정은 스스로가 잊어버린 과거를, 아니 누군가에 의해 스스로 잊어버릴 수 없었던 과거를 수색해나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를 끈질기게 따라간다. 어쩌면 제니퍼 폭스는 스스로의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용기의 경험을 공유하고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관객들이 자신에게 연대해주길 바라며 이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용기를 갖기 바라며, 모든 가해자들이 처벌받기를 바라며, 가해자들로 인해 기억의 어느 순간을 묻어둬야 하는 누군가가 더 이상 생기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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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인 로라(로라 던)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의뢰인 풀러(자레드 해리스)와 8개월째 씨름 중이다. 그는 다른 남성 변호사의 말을 듣고 바로 납득하는 풀러를 보며 자조한다.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새로 지을 예정인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재료로 쓸 벽돌을 얻기 위해 홀로 사는 노인 앨버트(린 어벌조노이스)를 찾아간다. 지나는 앨버트를 설득하지만 함께 간 남편은 자꾸만 벽돌을 굳이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벽돌을 얻은 지나의 뒷모습에 앨버트는 “아내가 내조를 잘 하네요”라고 지나의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목장에서 말을 돌보며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여인(릴리 글래드스톤, 극에 이름이 나오지 않음)은 우연히 사람들을 따라 학교법 강의에 오게 된다. 수업의 강사인 변호사 초년생 엘리자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는 4시간이 걸리는 리빙스톤에서 학교를 오가며 수업을 진행한다. 여인은 엘리자베스에게 식당을 안내해주며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세 에피소드가 107분 동안 이어지며, 각 에피소드가 비슷한 시간대에 벌어진 일임을 암시하는 느슨한 연결고리만을 남기는 <어떤 여자들>은 이야기가 아닌 뉘앙스를 통해 에피소드들을 잇는다. 노골적이지 않지만 집중하고 주의 깊게 감상하면 드러나는 여성의 삶과 일상, 어떤 네 여인이 세상과 맞서가며 살아야 하는 모습, 거기서 비롯되는 외로움과 피곤한 감정이 굵은 입자의 16mm 필름 화면에 담긴다. 몬타나 주의 겨울이 주는 황량한 길은 여인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앞선 두 에피소드의 로라와 지나가 여성이기에 받는 시선과 차별들은 몬타나의 이미지와 겹쳐져 하나의 뉘앙스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노골적인 고발이나 폭로가 아닌, 그렇게 살아가게 된 두 여인의 모습을 그저 담아낸다. 16mm 필름의 굵은 입자는 그 삶이 겉보기엔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그 내면은 거칠고 불안정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목장을 관리하는 여인과 엘리자베스의 묘한 감정선과 소박한 연대는 앞선 두 여인의 모습의 위로가 된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를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어둠 속에서>, <웬디와 루시> 등의 전작들에서 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점은 알고 <어떤 여인들>을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길이라는 테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다. 그것은 밝고 즐겁고 경쾌할 수도 있고,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으며, 험난한 장애물일 수도 있다. <어떤 여자들>은 주위가 텅 비고 황량한 길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가져와 에피소드의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달리는 차를 잡는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을 잡아내고, 창에 비친 길의 모습과 함께 얼굴을 보여준다. 이미지가 곧 감정으로 작용하는 영화적 연출은 <어떤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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