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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스티스 리그>의 실패로 DC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거의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아쿠아맨>을 보고 왔다. <컨저링> 유니버스를 성공시키고 <분노의 질주: 더 세븐>으로 액션 블록버스터 경험까지 쌓은 제임스 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등대지기와 아틀란티스의 여왕 아틀라나(니콜 키드먼) 사이의 아들인 아서 커리(제이슨 모모아)가, 아틀란티스가 왕위에 오른 아서의 이부동생 옴(패트릭 윌슨)의 욕망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메라(엠버 허드)의 요청에 따라 바다의 왕이 되는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쿠아맨>의 이야기는 아주 익숙하다. MCU의 <블랙팬서>나 <토르: 천둥의 신>에서 보아온 형제간의 왕권 다툼, 세계를 구할 운명을 타고 난 주인공 등 슈퍼히어로 장르의 클리셰가 이 영화 안에 촘촘히 박혀 있다. <저스티스 리그> 직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아쿠아맨>은 아서 커리가 진정한 바다의 왕으로 거듭나는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단순한 이야기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볼거리를 동원한다. 옴의 사주를 받은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 마틴 2세)와 아서가 벌이는 격투, 오프닝부터 펼쳐지는 아틀라나의 액션과 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 메라의 액션, 아틀란티스를 비롯해 눈부시게 펼쳐지는 바닷속 왕국들, 재난영화를 방불케 하는 해일, 제임스 완의 장기인 호러적 연출,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는 어트랙션 연출과 <반지의 제왕>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의 거대한 전투를 연상시키는 전쟁 장면, <고질라>를 보는 것만 같은 거대괴수의 출현까지, 한 편의 블록버스터가 담을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143분의 러닝타임 안에 빼곡히 들어가 있다.



 그렇기에 <아쿠아맨>은 조금 산만해지기도 한다. 특히 바다를 벗어나 사하라 사막이나 시칠리아 섬 등의 지역으로 아서와 메라가 옮겨가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뜬금없는 음악들은 제임스 완의 전작인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을 연상시킨다. 갑작스러우면서 유치하게도 느껴지는 이러한 연출은 영화의 흐름을 깬다. 또한 아무리 아서 커리의 성격이 불 같고 직선적이라고 해도, 영화의 전개를 위해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패작이었던 <저스티스 리그>와는 다르게 안정적인 촬영과 직선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게 전달하려는 교차편집 등이 등장하지만, 몇몇 불안정한 요소들은 <아쿠아맨>을 평작의 위치에 머물게 한다.



 다만 DC와 워너의 입장에서는 <아쿠아맨>이 평작의 위치에 서기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에서의 흥행이 이들에겐 매우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지금 DC에게 필요한 것은 평작의 흥행이다. <아쿠아맨>이 모두의 지지를 받는 작품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누군가에겐 유치하게 다가오고, 누군가에겐 산만하게 볼거리만 늘어놓는 영화일 수도 있다. 동시에 또 누군가에겐 볼거리로 가득한 놀이동산 같은 영화일 수도 있다. <아쿠아맨>의 위치는 익숙한 평작, 딱 거기까지다. DC의 그다음 발걸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할 따름이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964년, 판스워스 여학교에 다니던 학생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포탄 파편이 다리에 박히는 부상을 당한 북부군 존(콜린 파렐)을 발견하고 학교로 데리고 온다. 전쟁으로 대부분의 학생이 떠난 학교에는 교장인 미스 마사(니콜 키드먼), 선생인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 에이미와 알리시아(엘르 패닝)를 비롯한 다섯 학생만이 남아있다. 영화는 전쟁 속에서도 생활을 유지해가는 일곱 명의 여성 사이에 한 명의 남성이 도착하고 (혹은 한 공동체에 이물질이 떨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마리 앙투아네트>, <블링 링> 등의 여성 중심 영화를 만들어온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신작이며,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토머스 컬리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이미 돈 시겔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존으로 캐스팅해 연출한 작품이 1971년에 제작되기도 했었다. 돈 시겔의 작품은 남성, 다시 말해 존의 시선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영화와 관객 역시 그에게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반면 소피아 코폴라의 이번 영화는 관점을 뒤바꿔 여성 공동체에 갑작스레 나타난 외부인에 대한 반응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카메라가 존의 시선으로 사용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존은 숲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버섯을 따러 다니던 에밀리에 의해 발견되고, 학교의 여성들에 의해 구조되며, 몇몇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시점 쇼트를 제외하면 카메라는 언제나 존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방향을 유지한다. 다리를 다쳐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실의 침대에서 보내는 그에게 대화가 허락될 때는 학교의 여성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뿐이다. 영화는 착실하게 그의 발언권을 제한해가면서, 욕망을 내비친 마사의 은근한 대사, 크리스마스 때나 착용하던 핀을 다시 꺼낸 에드위나, 인사하면서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알리시아의 제스처 등을 통해 감정을 쌓아간다. 카메라가 존의 시선을 반영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 걸쳐 딱 하나의 시퀀스뿐이다. 다리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존이 정원일을 도와주자 에드위나와 알리시아 등의 인물들이 동물원의 동물처럼 존을 쳐다본다. 카메라는 그제야 렌즈와 존의 시선이 일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 상황에서 존은 스스로 자신이 암사자들에게 둘러 쌓인 수사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학교를 감싸고 있는 벽과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동물원 속 동물일 뿐이다.



 영화는 이렇게 존을 관찰하며 자신의 감정 변화와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들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동시에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거리를 두어 관객이 어느 인물 하나에게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 존의 감정에 이입하며 신체적 결함과 수적 열세에도 남성성을 마음껏 휘두르며 이에 반응하는 여성들을 관찰하던 돈 시겔의 작품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때문에 콜린 파렐의 이름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오프닝 크레딧은 일종의 맥거핀으로 작용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만큼은 아니지만, 느끼하고 끈덕지게 자신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존과 학교에 갑자기 던져진 이물질에 각자 반응하는 마사, 에드위나, 알리시아의 반응을 그저 보여준다. 뛰어난 배우들의 사소한 재스쳐들이만들어내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인물과는 거리를 둔 채 인물의 욕망이 관객에게 투사되지 않도록 유도한다. 각 인물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만, 그것을 명확한 이미지로 구사하는 대신 수많은 재스쳐와 뉘앙스뿐인 대사들로 채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쌓아 올려진 긴장감이 폭발하고, 존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그의 고성이 음악실을 뚫고 나와 학교 전체에 울려 퍼지면서 공포가 조성된다. 동시에 이는 아주 간결하게 해결되어버리는데, 분명히 서스펜스를 조성하기 위한 정석적인 장치들이 동원되면서도 건조하게 느껴지는 저녁식사 장면은 존이 내세운 남성성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우아하게 그려낸다.



 때문에 <매혹당한 사람들>은 소피아 코폴라가 돈 시겔의 작품을 비롯해 남성성이 대두된 70~80년대 영화들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진다. 남성 주인공의 시선을 배제한 채 여성들의 시선만으로 영화를 꾸리고, 각 캐릭터의 인상을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만으로도 원작의 전혀 다른 변형이 된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35mm 코닥 필름으로 촬영된 1.66:1 비율의 화면, 인공적인 조명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인상주의 화풍처럼 빛을 담아낸 미장센 등은 <매혹당한 사람들>이 어느 시기의 작품들에 대한 대응인지를 우아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매혹당한 사람들>은 관객들이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에서 기대하던 것들이 담겨있는, 그의 작품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담겨있는 우아한 작품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들도 그랬지만, 그의 신작인 <킬링 디어> 또한 굉장히 불쾌한 작품이다. <더 랍스터>에 녹아들어 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 덕분에 나름 즐기면서 볼 수 있었지만, <킬링 디어>는 <송곳니>만큼이나 관객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불쾌함으로 가득하다. 아니 사람에 따라 더욱 불쾌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그리스 신화 속 비극 이야기 중 하나인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를 영화의 줄거리로 가져온다. 신화는 트로이의 장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여 그의 분노를 사고,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쳐 그 분노를 달래려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의사인 스티븐(콜린 파렐)이 수술 중 마틴(배리 케오간)의 아버지를 사망하게 만들고, 마틴이 그에 대한 복수로 스티븐과 안나(니콜 키드먼) 사이의 두 자식인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을 죽이려고 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틴이 사용하는 방법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범죄수단이 아닌, 초현실적인 저주의 형태로 드러난다. 영화는 저주의 이유와 원인을 천천히 드러내며 관객을 모호함 속으로 이끌어간다. 



 여러모로 나홍진의 <곡성>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끼를 물어버리고, 그들은 영화 밖에서 신적인 위치에 군림하고 있는 감독에 통제 하에 있는 모호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의 인물들은 혼돈 속에서 애처롭게 방황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러한 방식의 영화는 혼돈을 감독이 관객과 벌이는 야바위처럼 다룬다. 결국 감독의 속임수에 관객은 낚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은 착취당한다. <킬링 디어>의 인물들은 굉장히 건조한 톤으로 대사를 내뱉는데, 그들의 말은 극단을 오가는 음악과 상반되어 관객에게 불안감을 주입한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트래킹, 줌인/아웃 등을 반복하는 카메라는 대사의 톤과 음악이 주는 상반되는 분위기에 적당히 편승한다. 결과적으로 <킬링 디어>는 <곡성>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통제하는 주입된 불안감 속에서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작품이다. 때문에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신화의 형식 안에서 감독의 위치는 신에 해당한다. 



 <더 랍스터>의 인물들에겐 최소한의 선택지가 있었고, 결국 탈이분법적인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두 주인공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송곳니>는 한 가정을 통제하려는 그릇된 가부장의 독재 하에서 착취당하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에서 <더 랍스터>의 탈주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송곳니>의 가부장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이나 인간 사이의 불신 같은 소재와 주제들은 란티모스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기 위한 주춧돌로서 기능한다. 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서 쓰러지는 밥의 모습을 부감으로 촬영한 장면 등은 란티모스의 욕구를 드러낸다. 이피게네이아 등의 신화를 현대의 독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서술자가 신이 아닌 관찰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서술한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라는 신화적 이야기에서 신의 위치에 서길 욕망한다. 그러한 욕망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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