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영국의 케이블 방송국 채널4의 히트작 중 하나인 <블랙미러>는 2016년 10월 공개와 함께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가 되었다. 현재 4개의 시즌, 총 19편의 에피소드가 공개되어 있고, 올해 하반기 시즌5 공개가 예정되어 있다. 영국의 코미디언인 찰리 브루커가 제작, 기획, 각본을 맡고, 에피소드 별로 다른 감독들이 연출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블랙미러>는 (첫 에피소드인 <공주와 돼지>는 달랐지만) 근미래를 배경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선보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가령, 모두가 실시간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SNS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기록되고 재생 가능하며 심지어 상대방을 블러 처리할 수 있는 기술, 의식을 작은 칩에 옮겨 가상세계 안에서 영생할 수 있는 기술 등이 <블랙 미러>에 소개되었다. <블랙미러>가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했다. 채널4를 통해 방영되던 시절보다는 쇼의 수위나 충격의 정도가 약해졌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럼에도 <샌 주니페로>처럼 다른 에피소드와는 차별화되는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USS 칼리스터>나 <블랙 뮤지엄>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조금 더 깊은) 고민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이는 내용적인 변화이지, <블랙미러>가 기존에 가졌던 형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8년 말에 공개된 <밴더스내치>는 조금 달랐다. 인터랙티브 필름을 표방한 <밴더스내치>는 영화 속의 여러 순간들을 관객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가령 아침에 먹을 시리얼의 종류나 버스에서 들을 음악과 같은 사소한 것부터, 동업 제안이나 죽은 어머니에 대한 상담을 이어 나갈 것인지 등 중요한 순간의 결정까지 다양한 순간들이 관객의 선택지에 놓이게 된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죽은 어머니가 남긴, 이야기 속 주인공의 행동을 독자가 결정할 수 있는 책인 ‘밴더스내치’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게임을 만드는 스테판(핀 화이트헤드)은 게임 회사의 제안을 받고, 프로그래머인 콜린(윌 폴터)의 도움을 받아 게임을 완성하려 한다. 굉장히 직선적인 이야기이지만, 넷플릭스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플랫폼의 가능성을 활용하여 이를 인터랙티브 필름으로 제작했다. 관객은 스테판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그에 따라 10개가 넘는 다양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밴더스내치>의 러닝타임을 90분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어떤 선택지를 고르냐에 따라서 러닝타임은 40분에서 두 시간 이상까지 다양한 길이로 존재하게 된다. <밴더스내치> 한 편을 위해 300분 분량의 영상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러닝타임과 엔딩의 다양성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인터랙티브 필름이 <밴더스내치>만의 혁신적인 성과는 아니다. 최초의 인터랙티브 필름은 1953년 CBS의 어린이 프로그램인 <윙키 딩크 엔드 유>였고, 1962년 체코의 영화감독 라두스 킨세라가 만든 <Kinoautomat>가 첫 인터랙티브 영화였다. 1993년에는 좌석에 달린 조이스틱을 통해 상영관 안 관객들의 다수결 투표로 진행되는 극장용 인터랙티브 필름 <아임 유어 맨>이 개봉했다. 국내에선 조영호 감독이 1999년에 연출하고 인터넷으로 공개된 <영호프의 하루>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처음 인터랙티브 필름을 접한 것은 놀이공원에서였다. 초등학생 때 (아마도 롯데월드로 추정되는) 한 놀이공원에서, 4D 효과와 함께 좌석에 달린 버튼으로 투표를 진행하여 선택지를 다수결로 고르게 하는 어트렉션을 탔던 기억이 있다. <아쿠아맨>처럼 바닷속 세계를 탐험하는 내용의 어트랙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인터랙티브 필름인 <스티븐 스필버그 디렉터스 체어>는 일종의 게임으로 받아들여졌다. Interactive Cinema Group의 작업들 중 하나인 <NEW ORLEANS IN TRANSITION : 1983-1986>은 네티즌들이 영화의 시퀀스들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고 인터랙티브 툴을 통해 도시의 변화 과정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넷플릭스는 <밴더스내치> 이전에 <마인크래프트: 스토리 모드> 등 아동용 컨텐츠를 통해 플랫폼에 인터랙티브 필름 형식을 시험해왔다. 인터랙티브 필름은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아동용 컨텐츠, 인터넷 드라마, 극장용 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게임 등 다양한 형식으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넓은 의미에서, 영화적 내러티브와 카메라 구도 등을 채택하는 <레드 데드 리뎀션>이나 <마블 스파이더맨> 등의 콘솔 게임들도 일종의 인터랙티브 필름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터랙티브 필름들은 언뜻 보기에 관객(혹은 플레이어)에게 서사에 대한 자유도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터랙티브 필름의 첫 사례인 <윙키 딩크 앤드 유>(이 작품은 TV화면에 플라스틱 판을 대고, 캐릭터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를 들어 길을 그려준다던가 하는 방식이었다)가 알려주듯, 관객의 역할은 극 중 인물이 정해진 서사를 쫓아가는 것을 보조하는 것에 그친다. <밴더스내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러티브와 형식 양측에서 관객은 스테판을 조종하는 의문의 손길로 존재하지만, 여러 차례의 선택지 이후에 도달하는 엔딩들에서 관객이 맞이하는 것은 ‘되돌아가기’ 혹은 다시 등장하는 갈림길 직전의 선택지이다. 결국 관객은 (뒤로 가기나 엔드크레딧 보기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이상) 영화가 제시하는 여러 엔딩들을 향해 계속해서 관람(혹은 플레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 끝에 도달하는 엔딩들과 이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결국 열린 결말 대신 닫힌(정해진) 결말로 치닫는다. ‘어느 타이밍이 선택지가 등장할 것인가’라는 포인트를 통해 만들어진 서스펜스는 관객에게 선택과 서사 구성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러나 관객이 도달하는 지점은 인터랙티브적 구조를 취한 극영화들, 가령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나 <메멘토> 또는 더그 라이만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위시한 타임루프 영화들의 닫힌 결말과 유사하다. <밴더스내치>가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화 속 선택지와 엔딩을 표로 만든 것이 SNS에 돌아다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이나 <GTA>와 같은 오픈 월드 게임에서도 몇 가지 정해진 엔딩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밴더스내치>의 엔딩 중 ‘소위 넷플릭스 엔딩’으로 불리는 엔딩이 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관객의 선택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스테판은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 누구냐’며 소리치는 장면 이후 ‘넷플릭스’와 8비트 게임 아이콘 같은 선택지가 등장한다. ‘넷플릭스’를 선택하면 스테판이 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에 넷플릭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이후 스테판은 상담사와 결투한 뒤 아버지에게 끌려가거나, 상담받던 장소가 넷플릭스 영화의 촬영 장소였다는 것이 드러나며 끝난다. 이러한 엔딩은 관객의 능동적인 선택으로 인해 어떤 결말에 도달한다기 보단, 이미 넷플릭스가 만들어 놓은 어떤 미로 안에 관객들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 안에서 스테판이 만든 게임은 경로가 막힐 때마다 게임 자체가 멈춰버리지만, <밴더스내치>는 앞의 내용들을 요약해주는 짤막한 몽타주 플래시백을 통해 이야기를 앞으로 되돌려버린다. 결국 영화 안에서 관객은 넷플릭스로 지정된다. 자유로운 관객의 능동성과 열린 결말의 가능성을 홍보도구로 삼은, 인터랙티브 필름을 표방한 <밴더스내치>는 형식에서나 내용에서나 관객을 고립시키고야 말게 된다.



 결국 <밴더스내치>는 (상업적/내러티브적 측면에서) 인터랙티브 필름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그친다. 이것이 넷플릭스의 플랫폼과 <블랙미러>의 브랜드를 통해 탈-역사적으로 넷플릭스의 구독자 앞에 등장했을 뿐이다. 이 영화에 새로울 것은 없다. 단지 넷플릭스가 <블랙미러>라는 컨텐츠를 통해 이를 시도했다는 점이 <밴더스내치>를 새로워 보이게 만드는 지점이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말이나 기술과 형식을 가지고 노는 <블랙미러> 시리즈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밴더스내치>는 게임이 아니라 영화”라는 찰리 브루커의 말 또한 <블랙미러>가 그간 이어온 방향성과 함께 <밴더스내치>가 ‘결국 닫힌 결말로 향하는’ 작품이라는 지점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내러티브를 활용하는 인터랙티브 필름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언뜻 그 한계를 인지하며 가지고 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를 과시하며 관객을 동참시키기보단 고립시키는 한계. 생각해보면 <블랙미러>에서 가장 인터랙티브한 작품은 <샌 주니페로>였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넘나들며 두 주인공의 로맨스에 관객을 적극적으로 동참시키고, <블랙미러>의 에피소드 중 유일하게 엔딩 이후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작품. <밴더스내치>는 이러한 상상력으로부터 관객-플레이어를 고립시키고 선택지로 구성된 미로 속만을 빙빙 돌게 할 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향한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가 소규모 극장 개봉과 함께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이번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한 중산층 가정집의 가정부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쿠아론은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을 키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로마>를 통해 펼쳐 보이려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 멕시코의 한 도시, 카메라는 물청소 중인 어느 바닥을 비추고 있다. 물에 의해 비친 천장의 창문을 통해 종종 비행기가 지나가고, 물결을 따라 창문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카메라가 틸팅 하며 청소하는 클레오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한다. 



 쿠아론이 직접 촬영을 맡은 카메라는 클레오가 보낸 1년여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엔 같은 시기 한국을 연상시키는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이혼, 클레오의 임신 등 다양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종종 클레오의 시선에서, 종종 그를 관찰하는 시선에서 움직인다. 청소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땅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빨랫감을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틸팅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수평의 트래킹이나 패닝, 고정된 쇼트로만 담기던 클레오의 모습은 처음과 마지막에서만 상승의 순간 안에 놓이게 된다.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그간 알폰소 쿠아론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을 맡은 임마누엘 루베츠키의 카메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쿠아론의 작품은 아니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를 연상시키는 촬영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촬영은 클레오를 적극적으로 영화 속 풍경으로 위치시킨다. 



 안정적으로 1970~71년의 멕시코를 풍경화시키는 <로마>이 촬영은 몇 차례 그러한 안정성이 흔들리는 촬영을 보여준다.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아빠가 차를 몰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클레오의 애인인 페로민(조지 안토니오 구레로)이 성기를 들어낸 채로 배운 무술을 자랑하는 장면. 두 순간은 인물들을 풍경화시키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굉장히 남성적인 순간으로 다가온다. 돌출된 이 두 장면은 클레오의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어낼 인물들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두 남성이 돌출되는 모양새로 등장하는 반면, 클레오와 나머지 고용주 가족 등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풍경으로 존재한다. 영화의 마지막, 포스터에 등장하는 해변 장면이 되어서야 클레오는 풍경에서, 풍경을 뚫고 헤쳐 나오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전까지 카메라가 클레오나 고용주 가족을 그리는 방식은 매우 평면적이다.



 특히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과 클레오의 출산이 겹치는 장면에서 무덤덤하게 인물을 따라가기만 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압축하여 그 시대에 박제한다. 영화 중반부 잠시 등장하는 개의 머리 박제들과 클레오를 비롯한 인물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로마>가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생각해볼 때,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쿠아론이 지닌 당시 기억을 통해 그 시대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많은 평자들이 <로마>를 두고 ‘시대의 공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제는 ‘시대의 공기’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작품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로마>가 그려내는 ‘시대의 공기’는 1970년이라는 시간에 인물을 박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인물을 시대에 묶어 두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영화 속 ‘시대의 공기’라면, <로마>는 인물들을 풍경화하여 박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로마>의 마지막에서 파도를 뚫고 나가는 클레오의 모습은 풍경화된 평면을 뚫고 나온다. 오프닝과 이어지는 엔딩의 틸팅을 통해 상승하는 클레오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프닝에서 예고된 엔딩일 뿐, 영화는 내내 오프닝에서 제시된 관점을 따라간다. 오프닝에서 물에 비친 창문 속 하늘은 물이 흔들림에 따라 계속해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클레오가 바닥 타일에 낀 때를 쓸 때마다 물은 조금씩 탁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클레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클레오를 바라보는 것, <로마>에서 쿠아론이 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것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것인지, 쿠아론이 자신을 성장시킨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읽어야 할지, 시대에 박제된 사람들을 관찰하는 이야기로 볼 것인지는 <로마>를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다만 루베츠키의 방식을 따라가는 쿠아론의 촬영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있어서 쿠아론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넷플릭스의 새 오리지널 영화 <데스노트>가 공개됐다. 오바타 다케시와 오바 츠구미의 소년 점프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미 일본에서 TVA와 2부작 영화(그 외 스핀오프 두 편)로 제작됐었고, 국내에서 뮤지컬로 공연되기도 한 작품이다. TVA를 제외하면 『데스노트』를 영상화한 대부분의 작품은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넷플릭스가 <블레어 윗치>의 애덤 윙가드를 기용해 제작하는 <데스노트>에 대한 기대는 굉장했고, 8월 25일 공개 이후 SNS에서 많은 수의 언급을 기록하고 있다. ‘이름을 적으면 죽는 노트’, ‘라이토(이번 이름은 라이트)와 L의 대결’이라는 설정만 남긴 채 이야기를 새로 쓴다. 인디호러씬에서 활동하던 애덤 윙가드답게 호러영화의 요소를 잔뜩 가져와 <데스노트>의 이야기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넷플릭스의 야심작 <데스노트>는ㅜ또 한 번의 실패로 남는다.



 고등학생인 라이트 터너(냇 울프)는 어느 날 검은 노트를 줍게 된다. 방과 후 벌칙으로 교실에 홀로 남은 라이트는 노트를 살펴본다. 표지에 데스노트라고 적인 이 노트에는 죽음의 규칙이 빼곡히 쓰여 있고,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노트를 살펴보던 중 사신 류크(윌렘 데포)가 나타나고, 라이트는 류크의 말에 따라 자신을 괴롭히던 상급생의 이름을 적는다. 노트가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된 라이트는 미아(마가렛퀼리)와 함께 노트를 통해 범죄자들을 처단하고, 자신들을 키라(KIRA)라 부른며 신세계를 만들어갈 꿈을 꾸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세계적인 탐정 L(키스 스탠필드)은 이러한 범죄자 대량 사망 사건이 특정인에 의한 것임을 알아채고 수사에 돌입한다. L은 라이트의 아버지이자 경찰인 제임스(시어 위검)에게 키라대책본부의 수장을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애덤 윙가드의 <데스노트>는 초반부터 강렬하다. 정확한 죽음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신 이름만을 적어 심장마비로 사람들을 죽였던 원작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번 영화에서는 상세하게 죽음의 순간을 서술하고 그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죽음의 사고가 벌어지고, 영화는 사고의 과정을 골든 두들 장치가 작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듯 묘사한다. 자동차 사고로 인해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져 죽는 모습은 고어 장면을 보지 못하는 관객이라면 놀랄만한 장면이다.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인 라이트는 노트의 힘을 확인한 뒤 미아와 함께 본격적으로 범죄자 처단을 시작한다. 영화는 정확히 이 지점까지, 아니 첫 희생자가 죽는 지점까지만 흥미롭다. 죽음의 순간을 심장마비 대신 잔혹하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것으로 바꾼 선택은 나름 신선한 선택이다. 그러나 <데스노트>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두뇌싸움이며, 라이트와 L이 서로의 생각을 읽어 한 수라도 더 멀리 내다보려는 범죄 스릴러이다. 고어를 비롯한 호러적 요소는 양념처럼 작용할 수 있었지만, 스릴러로써의 허술함을 감추지 못하고 죽음의 순간에만 힘을 준 연출과 각본은 실패 그 자체이다.



 원작과 상당 부분 달라진 캐릭터도 영화의 큰 패착이다. 샤프한 이미지의 천재이자 정의라는 목적으로 키라가 되었기에 주제의식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었던 라이토는 찌질한 너드이자 정의라는 큰 목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캐릭터로 그려지는 라이트가 되었다. 흰 긴팔 티셔츠에 청바지만을 입고 쪼그려 앉아 단 것만을 먹으며 추리를 하던 L의 이미지를 180도 뒤바꿔 검은 옷을 두르고 마스크를 한 채 등장하는 갱스터 스타일의 L이라는 비주얼은 신선했지만, 논리적인 추리 대신 촉을 따라서 움직이는 모습을 더욱 많이 보여주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일삼으며 폭력적으로 식탁의 음식들을 쓸어버리고, 아예 경찰차를 훔쳐 폭주하는 후반부의 모습은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싶은 생각만 들게 한다. 라이토에게 노트만 전해주고 관전자의 위치로 빠져 인간들의 게임을 즐기던 사신 류크는 사건에 너무 많이 개입하는 캐릭터로 변해버렸다. 라이토의 장기말이자 수동적으로 그에게 조종당하기만 했던 원작의 미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일방적으로 조종당하는 위치에서는 벗어난 미아라는 캐릭터로 바뀌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캐릭터의 존재 이유가 뭔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데스노트>에서의 캐릭터 변화는 최악이다. “정의를 위해 범죄자를 살해해도 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졌던 원작의 주제는 원작의 캐릭터를 해체하고 새롭고 구린 캐릭터를 만들어낸 애덤 윙가드와 각본가의 손에 의해 해체되어 사라진다.



 사실『데스노트』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2006년의 <데스노트>가 2부작으로 제작되고 니아와 멜로가 등장하는 원작의 2부를 아예 삭제한 것은 각색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원작을 잘 구현했고, 크게 무리 없는 각색으로 마무리 지은 일본의 2부작과는 다르게, 애덤 윙가드의 <데스노트>는 101분의 러닝타임에 무리하게 이야기를 쑤셔 넣는다. 때문에 추리도, 주제도, 키라의 존재감도, 캐릭터도 실종된 결과물이 나오게 되었다. 원작과 큰 차이를 보이는 몇몇 설정(심지어 노트의 규칙이 변경된 부분도 있고, 이것은 최악의 결과를 보여준다)은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으로 남게 됐다. <데스노트>를 본관객은 “내가 원작자라면 애덤 윙가드의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어 버릴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오바타 다케시는 대체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일까? 자신에게 판권료가 들어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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