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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감독은 카메라를 들어 동네의 한 백구를 촬영한다. 대관령 슈퍼의 주인아저씨가 밥을 주고 산책도 시켜주며 지내는 이름 없는 백구, 한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걷는 늙은 백구. 김보람 감독은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백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작은 기억들을 풀어놓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개의 역사를 알아가는 듯 영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목소리로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감독의 카메라는 백구처럼 이름 없는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매일 같이 스쳐 지나가지만 이름은 모르는 이웃, 붙여진 이름이 있을까 싶은 골목길,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르게 변해버린 학창 시절의 동네, 동네 정자에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모습,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비둘기들 등이 카메라에 담긴다.



 개의 역사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듯이 다른 이름 없는 것들의 역사를 알아내는데도 실패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버린 어르신들, 백구와 마찬가지로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는 비둘기를 비롯한 동물들, 계획 없이 난잡하게 만들어진 골목길들…… <개의 역사>는 이렇게 외롭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도 없는 대상을 담아낸다. 그들의 역사는 알아내지 못했어도, 각 대상 개개의 이야기를 끌어와한 편의 영화로 완성시킨다. 때문에 중심점이 없는 이야기처럼 영화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주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엮어 새로운 서사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거친 질감의 촬영과 편집이 다소 불편하고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수평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기울어져 있다. 과하게 줌을 당겨 화질이 조금 깨지는 장면도 많다. 이러한 화면들은 스크린 밖의 현실에서 영화가 담아내려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그리고 동시에 감독의 시선을 반영한다. 우리는 그 대상들을 삐뚤어지게, 흐릿하게 바라보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몇 차례 핸드헬드로 찍은 몇몇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독특하게도 하나의 영상으로 쭉 이어가기보다는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정지화면으로 진행된다. 영상으로 쭉 이어졌다면 놓쳤을 골목, 보도블록, 창문, 표지판, 복도등이 관객의 눈에 들어온다. 영화 상영 후 토크를 진행한 세컨드 필름 매거진의 정경희 에디터는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을 발굴해 호명하는 영화”라고 <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독특한 영상은 이름 없는 것들을 호명하는 영화의 주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개의 역사, 걔의 역사, 개개의 역사, 말장난 같지만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그리고 감독이 나름 노렸다고도 말한) 평이다. <개의 역사>는 항상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들의 역사를 다시 조명하려 하고, 결국 개개의 역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개개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가능했고, 일정 부분 성공한다. 김보람 감독이 담아낸 단편적인 개개의 역사는 83분의 영화로 엮여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한 사람이 평생 흘리는 생리의 양은 야 10L 정도이다” 인류의 절반은 생리를 필연적으로 겪는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으로 이어지고 기록되어 온 인류의 역사 속에서 생리는 불결한 것, 감춰야 할 것, 더 심각하게는 사악한 것 또는 죄악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생리대, 탐폰, 생리컵 등 다양한 생리용품이 등장하고, 생리라는 현상 자체가 한국과 미국 등을 비롯해 세계 많은 국가들의 정치적 의제로 떠오르면서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피의 연대기>는 어떤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등장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는 김보람 감독이 자신의 네덜란드 친구 샬롯에게 생리대 파우치를 선물했다가, 샬롯은 초경 이후 탐폰만을 사용해왔기에 파우치를 받고 당황스러워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생리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위와 같은 에피소드로 시작된 영화는 생리라는 현상과 그것이 남성적으로 구성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보여주고, 과거 사용했던 생리용품부터 현재의 탐폰과 생리컵의 이르는 역사를 연대기적 구성을 통해 제시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생리용폼 문제부터 여성의 몸이라는 키워드에 이르는 정치적 의제로서의 생리까지 이야기한다. 영화 안에서 챕터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세 가지의 맥락으로 구분되어 8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들은 “월경 위키피디아”라는 조혜영 프로그래머의 평으로 설명된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를 겪지만 탐폰이나 생리컵 같은 용품들이 아직은 어색한 관객이 보기에도, 생리를 겪지 않기에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던 사람이 보기에도 적절하다. 어쩌면 한국 교육계는 <피의 연대기>라는 최고의 성교육 교보재를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보고 나오면서는 더더욱 <피의 연대기>를 초중고 성교육 과정의 교재로 포함시켰으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에 대해, 여성의 몸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흡인력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뮤지션 김해원이 맡은 음악은 물론, 다양한 그래픽과 김승희가 맡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요소들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이 흥미를 잃는 순간이 없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각 파트별로 다르게 사용된 편집들 또한 탁월하다. 가령 생리용품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김보람 감독의 할머니가 어릴 적 사용했던 방식에서 시작하여 각종 탐폰과 생리컵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생리대-탐폰-생리컵의 연대기 순으로 담아내고, 정치적 의제로써의 생리를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뉴욕에서의 생리대 무상지원 법안 발표의 순간에서 뒤로 돌아와 한국과 미국에서의 논의를 보여주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액자식 구성을 택한다. 각각의 구성은 각각의 주제와 정보를 전달하는데 최적의 효과를 보여주고, 중간중간 직접 생리용품을 사용하는 장면(생리컵에 담긴 생리혈을 버리는 장면 등)이나 생리컵의 사용법을 들은 할머니가 놀라는 장면과 같은 순간들은 영화적으로 관객의 집중을 끌어 모은다. 여기에 적절하게 사용된 그래픽과 애니메이션, 음악 등의 요소까지, <피의 연대기>는 김보람 감독이 단순 정보 전달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게 아닌 정보를 영화적으로 재가공하여 전달하는데 재능이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피의 연대기>가 지닌 섬세함이다. 두 가지 부분에서 충격이라고 할 정도의 놀라움을 받았는데, 첫 부분은 모든 인터뷰이의 이름 표기와 오프닝 크레딧의 스탭 명단에서 성을 표기하지 않고 이름만 작성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재명 성남시장은 재명, 심상정 국회의원은 상정, 김보람 감독은 보람이라는 식으로 영화 속에서 이름이 표기된다. 성명(姓名)에서 성을 배제하고 명만 표기했다는 것은 부계혈통을 통해 전해지는 가부장제의 산물인 성을 영화 내부에서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그간 여성의 몸은 남성에 의해 기록되고, 타자화 되어왔으며, 죄악시되기까지 했다. 성을 제거한 이름 표기는 그러한 역사에 대한 단절을 꾀하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또 하나 놀랐던 부분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터뷰이의 직업을 표기하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는 많은 인터뷰이가 여러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에 따라, 혹은 제시되는 사건에 따라 그들의 직업 표기가 변경된다. 가령 첫 등장에서 현재의 직업인 ‘선생님’으로 직업이 표기되던 인터뷰이는 한양대 생리대 자판기 관련 논란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한양대 총여학생회 밀담’으로 표기가 바뀐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맞춰 표기를 변경하면서 한 사람의 여성이 다양한 층위를 지닌 개인으로서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직업 표기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따로 있다. 감독의 할머니인 여경주 할머니의 직업은 ‘가사노동 은퇴자’로 표기되고, 시카고에서 종교와 여성의 몸을 엮은 연구를 진행하던 대학원 연구생의 직업은 ‘공부 노동자’로 표기된다. 이러한 섬세함이 <피의 연대기>가 지닌 가장 큰 힘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생리에 대해 탐구하면서 자신의 몸을, 더 나아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한순간에 번쩍 뒤바뀌었다는 김보람 감독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생리에 대해 탐구한다는 것은 (물론 생리를 하지 않는 여성도 있지만) 여성의 몸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그동안 여성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왜 금기시되었는지 폭로하는 행위이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라는 현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그 역사를 제시함과 함께 재검토하며 과도기적인 현재는 얼마나 진전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저널리스트, 대학 학생회, 생리용품 리뷰어, 평론가, 연구생 등 수많은 곳에 존재하는 여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더 잘 피 흘리기 위해’ 활동해왔고, 이는 더 간편하고 위생적인 생리용품의 발명 및 보급이나 뉴욕시와 성남시 등의 무상 생리대 지급 등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아직 생리에 대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이를 공공정책으로 실현하는 의사결정권자들이 남성(이재명 성남시장,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영화는 이 역시 드러내며 앞으로의 변화는 어떨지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결국 <피의 연대기>가 이끌어낸 가장 큰 성취는 남성화된 역사에서 벗어나, 생리를 시발점으로 삼아 여성의 몸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유도하는 지점이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서 뭉클했다는 후기를 남기는 이유가 이러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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