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핀과 카롤> 칼리스토 맥널티 2019
칼리스토 맥널티의 <델핀과 카롤>은 프랑스의 여성배우 델핀 세리그와 비디오 아티스트 카롤 루소풀로의 공동작업을 다루고 있다. 카롤의 비디오 워크숍에 델핀이 참여하여 둘이 만나게 되고, 68혁명 이후 파리에 불어온 여성운동의 흐름에 힘입어 둘이 함께 해온 작업들을 훑는다. 둘의 작업에서 60~70년대 프랑스의 영화사, 당시 프랑스 여성영화의 흐름, 당시 프랑스 여성운동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렇다 할 문제 인식도 없이 남성에 의해 영화계가 굴러가던 시기였다. 델핀 세리그는 여성운동을 접한 뒤 의식적으로 여성작가, 여성감독들과 작업하기를 원하고, 이를 실천한다. 카롤의 워크숍에 참여한 것도 이것의 연장선상이었을 것이다.
60년대 후반 소니에서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와 비디오 테이프를 출시하면서, 미술계와 영화계엔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겨난다. 카롤은 프랑스에서 비디오 아트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다. 그는 무려 장 뤽 고다르에 이어 두 번째로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한 프랑스인이었다. 이제 막 탄생한 장르이기에, 비디오 아트는 남성 작가들에게 점령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때문에 카롤 루소풀로와 델핀 세리그는 이 영역에서 무척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또한 필름과 달리 촬영한 것을 즉시 확인할 수 있고, 바로 상영도 가능한 비디오카메라의 기능성을 통해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유튜브와 유사한 기능을 당시의 비디오가 수행한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적인 정부 하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수집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달거나, 밸러리 솔라니스의 <SCUM 선언문>을 읽고, 성매매 여성들의 농성을 비디오 매체의 신속성을 통해 담아내는 등의 활동을 이어간다. 아무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주지 않기에, 이들은 직접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자신, 여성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냈다.
<델핀과 카롤>은 두 여성의 공동작업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화계에서 델핀 세리그가 페미니스트 여성 배우로서 쌓아온 커리어를 요약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자크 드미의 <당나귀 공주>, 해리 퀴멜의 <어둠의 딸들>, 프랑수아 트뤼포의 <도둑맞은 키스> 등 델핀 세리그가 출연한 작품들의 푸티지가 이야기의 사이를 잇는 인서트로 등장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이나 상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등 델핀 세리그가 출연한 당시 프랑스 여성 감독들의 영화들 또한 당연하게 등장한다. 그렇다 보니, <델핀과 카롤>에는 씨네필이라는 열광할 법한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가령 델핀 세리그와 함께 작업한 상탈 애커만, 마르그리트 뒤라스, 릴리안 드 케르마데크가 함께 TV 인터뷰에 출연한 장면이라던가, 델핀이 [제2의 성]의 저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인터뷰하는 장면과 같은 귀중한 영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델핀과 카롤이 함께 ‘시몬 드 보부아르 영상 아카이브’를 설립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델핀 세리그의 이러한 활동들이 지니는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델핀과 카롤>은 두 사람의 공동작업을 통해 당시 프랑스 여성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품이었다. 낙태 허용, 가부장적인 정부에 대한 비판, 영화계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지적 등이 70분의 러닝타임 속에 압축되어 담겨 있다. 이러한 지점들이 2019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델핀 세리그와 카롤 루소풀로의 작업을 지금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들이 50여 년 전에 꺼낸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때문에 비디오 아트와 여성운동의 두 선구자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선구자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지금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